[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김해 곳곳에 남은 허왕후 발자취들

2021.02.08 06:00:00 16면

수로왕과 허왕후④

 

 

 

◇동이족의 여성중시 풍습

 

《삼국유사》에 기록된 수로왕과 허왕후의 국혼기사는 같은 시기를 기록한 다른 사료들과 확연하게 비교되는 특징이 있다. 허왕후 도래기사가 기사가 구체적이며 양성평등적이라는 점이다. 먼저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에는 ‘공주가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했는데 파도신이 막아서 가지 못하자 부왕이 파사석탑을 싣고 가라고 명해서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했다’고 말하고 있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공주는 5월에 아유타국을 떠나서 7월 27일에 가야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요디아 왕국이 있던 갠지즈강 상류의 5월은 배가 거슬러 올라가기 힘든 시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가 태국 메남강가의 옛 도시 아유티야를 거쳐서 왔다는 학설이 등장한 것이다. 길지 않은 구절이지만 현지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공주는 수로왕이 보낸 신하들을 따라서 가야 궁전에 들어가지 않고 수로왕을 나오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수로왕은 구간(九干) 등이 혼인을 권하자 하늘에서 짝을 맞이하게 해 줄 것이라면서 유천간에게는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왕비를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승점(乘岾)에 가서 왕비를 기다리게 했고, 얼마 후 허왕후 일행이 나타났는데 왕후는 수로왕이 직접 나오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과 붉은 기를 단 배 한 척이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니 왕이 기뻐했다. 구간(九干) 등을 찾아서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맞게 했다. 곧 모시고 궁궐로 들어가려는데 왕후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본래 모르는데 어찌 감히 가볍게 그대를 따라가겠는가.”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하자 수로왕은 그렇다고 여겨 유사(有司:관계자)를 거느리고 행차해서…(《삼국유사》 가락국기)」

 

허왕후가 ‘왕이 직접 나와 맞이하라’고 요구하자 수로왕이 직접 맞이하러 나왔다는 것이다. 국왕과 왕비 사이가 대등하다는 것인데, 고대 사료에서 아주 드문 내용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漢)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劉邦)과 그 부인 여치(呂雉:여후)의 혼인에 대해서 “고조가 한미하던 시절에 비가 되었다(高祖微時妃也)”라고 짧게 기록했다. 그것도 유방에 대해 기술한 〈고조본기〉가 아니라 여치가 고조 사후 여태후(呂太后)로써 여황제였던 시기를 기술한 〈여태후본기〉에서 이렇게 짧게 다뤘다.

 

《삼국사기》는 신라 개국시조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閼英)의 탄생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쓰고 있다. 신라가 건국한 지 4년 후인 혁거세 거서간 5년(서기전 53) 알영정(閼英井)에 용이 나타났는데, 그 옆구리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알영이라는 것이다. 한 노파가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거두어 길렀는데,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알영이라고 지었다. 자라서 덕이 있고 용모가 뛰어났는데, 시조가 이를 듣고서 왕비로 들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는 그 부인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은 대신 시조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하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나 백제 시조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召西奴)는 모두 시조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로 나온다. 이는 모계사회 전통이 강한 동이족 건국사화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어머니 아니면 아내가 중요하게 기록되는 것이다. 〈가락국기〉에는 허왕후가 수로왕을 만나서 함께 궁에 들어가는 노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주 자세한 허왕후의 상륙장면

 

「(수로왕이 행차해서) 종궐(從闕) 아래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땅의 산 주변에 만전(幔殿:장막 전각)을 치고 공경하게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 별포(別浦) 나루머리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다가 입고 있는 비단바지를 벗어 산령(山靈)에게 폐백으로 주었다(《삼국유사》 가락국기)」

 

허왕후의 가야도착과 관련한 지명은 아주 구체적이다. 유천간이 기다린 망산도, 신귀간이 기다린 승점, 왕후가 탄 배가 도착한 별포 등이 적시되어 있다. 필자는 2천여 년 전의 일을 기록한 고대 사료에서 왕비가 시집오는 장면을 이렇게 자세하게 쓴 사료는 본 기억이 없다. 〈가락국기〉는 가야사람들이 허왕후 사후 그와 관련된 장소에 이름을 붙여 모두 기념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189) 기사 3월 1일에 왕후가 붕(崩)하시니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이 땅이 무너진 듯 슬퍼하면서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마침내 왕후가 아래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처음 와서 닻줄을 내린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고 하고, 비단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가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삼국유사》 가락국기)”

 

중평은 후한의 12대 영제(재위 168~189)의 연호인데 중평 6년은 서기 189년이다. 이 기사는 가야사람들이 왕비가 탄 배의 깃발이 처음 보인 곳을 ‘기출변’, 바다에서 상륙한 곳을 ‘주포촌’,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령에게 폐백으로 주었던 곳을 ‘능현’이라고 이름 지어서 기념했음을 말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위치비정

 

 

허왕후 관련 지명들은 이름만 구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가락국기〉에 나오는 ‘주포촌’, ‘기출변’, ‘능현’ 등의 지명은 조선에서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김해도호부〉조에도 나온다. 허왕후가 산령에게 비단바지를 폐백으로 주었다는 능현(綾峴)은 ‘김해부 남쪽 30리 지점’이고, 허왕후가 배를 댄 주포촌은 ‘김해부 남쪽 40리 지점’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가야사람들이 지은 기념 지명이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가야불교연구회의 도명 스님은 이 지명들이 실제 어디인지를 찾아서 여러 번 현지답사를 수행했다. 유천간이 왕후를 기다렸다는 망산도에 대해서는 현재 부산시 강서구 송정동 산 188번지가 아니라 조선시대 경상 웅천(熊川)현 산하의 만산도(滿山島)라는 것이다. 만산도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지명인데, 망산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음운 변화에 의해 만산도로 불려 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신귀간이 왕비를 기다린 곳이 승점(乘岾)이다. 유천간이 망산도에서 공주가 탄 배가 오는 것을 보고 봉화를 올리면 승점에 있던 유천간은 보고 수로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말을 달려 간 곳이다. 따라서 승점은 망산도와 공주 일행이 배를 대는 곳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인데, 도명스님은 현재 녹산동 가주터널 위쪽 언덕이 그런 곳이라고 했다.

 

유천간 등이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는 도하륙(渡河陸)에 대해서는 만산도 동쪽으로 현재 유주비각이 있는 지점으로 비정한다. 이 지점이라야 별포 나루터 높은 언덕에서 잘 보인다는 것이다. 수로왕이 유사를 거느리고 공주를 맞으러 온 종궐에 대해서는 현재 보배산 아래 주포마을 서남쪽 어느 지점이고, 공주가 처음 배를 댄 곳이 별포는 오늘날 주포마을이라는 것이다. 이곳에 도착해 먼 항해 끝에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감사함녀서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산인 보배산 산신에게 비단바지를 폐백으로 올렸다는 것이다. 공주가 비단바지를 폐백으로 올린 능현은 헌공의식을 거행할만한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는 곳이니 이 역시 승점이라는 것이다(도명, 〈가락국 허황후 신행길의 새로운 고찰〉) 문헌을 가지고 직접 발로 답사하니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말하는 지명들을 현지에서 모두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손으로 쓴 문헌과 발로 뛰는 답사가 일치하면 옛 역사가 오늘에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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