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동수국사(同修國史) 민지
신라 제5대 임금이 ‘스님이사금’, ‘승려이사금’이라는 뜻의 ‘파사이사금(재위 80~112)’이라는 불교식 왕호를 갖게 된 수수께끼를 풀 단서가 있다. 고려 문신 민지(閔漬:1248~1326)가 쓴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楡岾寺史蹟記)〉이다. 강원도 고산군 서면 금강산에 있는 유점사의 창건 유래를 적은 기록이다. 이 기록은 ‘고려국 평장사 여흥부원군 시호 문인공(文仁公) 민지 지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민지가 역임한 평장사(平章事)는 중서문하성의 정2품 고위직이다. 그는 고려 원종 때 장원급제로 벼슬에 나온 후 충렬왕 21년(1295) 밀직학사(密直學士), 충렬왕 25년(1299) 동수국사(同修國史)를 역임한 역사학자였다. 지금은 역사 무지한(無知漢)들이 여러 고위직들을 차지하지만 고려·조선시대에는 어림도 없었다. 고려·조선은 역사를 모르면 고위직을 맡을 수 없었다. 고려는 종1품 시중(侍中)이 감수국사(監修國史)를 맡고, 중서문하성의 2품 이상 고위관료들이 수국사(修國史)·동수국사(同修國史)를 맡아 국사에 관한 사무를 총괄했다. 그 아래 역사편찬기구인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은 한림원(翰林院)의 정3품 이하 관원이 겸직했다. 그 아래 직사관(直史館)이 역사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관직인데, 7~9품 4인으로 구성되었다. 감수국사·수국사·동수국사·수찬관은 당연히 역사에 밝은 벼슬아치가 겸임하게 되어 있었다. 역사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이 없으면 전문직인 직사관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를 쓴 민지는 동수국사를 맡을 정도로 역사에 밝은 벼슬아치였다.
◆금강산은 이름이 다섯
민지가 쓴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는 금강산의 다섯 이름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째가 개골산, 둘째가 풍악산 셋째가 열반산, 넷째가 금강산, 다섯 번째가 기달산(怾怛山)인데, “ 앞의 세 이름은 이 지방의 고기(古記)에 나오고 뒤의 두 이름은 화엄경(華嚴經)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앞의 ‘개골·풍악·열반산’은 이 지방의 옛 기록에서 나왔고, ‘금강·기달산’은 《화엄경》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 역시 번뇌가 소멸된 상태나 진리를 깨달은 상태를 뜻하는 불교용어이니 다섯 중 세 이름이 불교식이다. 《화엄경》은 원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크고 반듯하고 넓은 이치를 깨달은 석가의 꽃처럼 장엄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화엄경은 세 종류 한문으로 번역되는데, 60권 화엄경, 80권 화엄경, 40권 화엄경이 그것이다. 60권 화엄경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359~429)가 418년~420년 사이에 한역(漢譯)했는데, 진(晉)나라 때 번역했다고 해서 진경(晉經)·진본(晉本), 또는 옛 번역이라는 뜻에서 구역(舊譯)이라고 한다. 80권 화엄경은 실차난타(實叉難陀:652~710)가 695년~699년에 번역했는데, 이때가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이 당(唐)나라를 대주(大周:690~705)로 바꾸어 통치한 시기이기에 주본(周本)이라고 하는데 주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쪽에서는 당나라 때라고 해서 당경(唐經), 또는 새롭게 번역했다는 뜻에서 신역(新譯)이라고 한다. 40권 화엄경은 8~9세기 때 인물인 반야(般若)가 795년~798년 사이에 번역했다.
민지는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에서 ‘금강산이’라는 이름이 《주본(周本:80권 화엄경)》에 나오는 이름이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본》에 이르되, ‘해중(海中)에 보살이 상주하는 곳이 있으니 이름은 금강산이고 보살의 이름은 법기(法起)인데 그 권속들과 항상 머물며 연설하고 있다’고 하였다.” 민지는 ‘지달산’이라는 이름도 《진본(晉本:60권 화엄경)》에 나오는 이름이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본》에 이르되, ‘해중(海中)에 보살이 상주하는 곳이 있으니 산 이름은 지달인데, 보살의 이름은 담무갈(曇無竭)로서 1만2천 보살 권속과 함께 항상 설법하고 있다’고 하였다.”
◆《신라고기》라는 책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는 《신라고기》를 근거로 금강산과 오대산을 비교하고 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서는 의상(義湘:625~702) 법사가 처음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갔다가 다음으로 이 산(금강산)에 들어왔는데, 담무갈(曇無竭) 보살이 현신(現身)해서 고하기를, ‘오대산은 행함이 있으면 몇 사람이 출세할 땅이지만 이 산은 행함이 없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출세할 땅이다’라고 말했다.”
《신라고기》에는 오대산은 행함이 있으면 몇 사람이 출세할 땅이지만 금강산은 행함이 없어도 수많은 사람이 출세할 땅이라고 나와 있다는 것이다. 《신라고기》는 언제 편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그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두 책보다 먼저 간행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삼국사기》에는 ‘강수(强首) 등이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을 인용할 때 《신라고기》가 나오고,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大祚榮)이 남은 군사를 모아서 대백산(大伯山)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발해라고 했다”고 말하면서 《신라고기》를 근거로 삼았다. 민지가 쓴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는 “금강산의 동쪽 계곡에는 유점(楡岾)이라는 절이 있는데, 53불의 존귀한 불상을 안치하고 있다”면서 《신라고기》를 근거로 이런 내용을 전하고 있다.
「《신라고기》에는 “옛날 주(周)나라 소왕(昭王) 26년 갑인(甲寅:서기전 1027)년 4월 8일에 우리 불(佛) 석가여래께서 중천축(中天竺) 가비라국(迦毘羅國) 정반왕궁(淨飯王宮)에서 탄강하셨다. 19세에 성(城)을 나가 출가하여 설산에 들어가 고행하신지 6년 만에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며 79년간 세상에 머무르시다 주 목왕(穆王) 임신(壬申:서기전 949)년 2월 15일 밤 열반에 드셨다.”」
석가가 열반한 후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사위성(舍衛城:Śrāvastī)에서 설법을 이어갔는데, 석가가 재세(在世)할 때 석가를 뵙지 못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상을 주조하라고 하면서 종도 하나 주조하게 했다는 것이다. 수없이 만들어진 불상 중에 53구를 선별했는데 문수보살은 이 불상들을 종에 넣고, 이 내용을 글로 적은 후 덮개를 주조해서 덮고 바다에 띄워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나의 스승이신 석가모니의 53불상은 인연이 있는 국토에 가서 머무르고 나 역시 그곳에서 설법해서 말세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겠노라.”
◆신라에 도착한 종과 불상
종은 물에 떠가다가 신룡(神龍)을 만나 월지국(月氏國)에 도착했는데, 월지국왕 이름은 혁치(赫熾)였다. 혁치왕은 불상과 지문(誌文)을 발견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전각을 마련해서 봉안했는데, 갑자기 전각이 잿더미가 되었다. 왕이 다시 세우려 했으나 석가가 꿈에 나타나 “나는 이곳에 머무르지 않겠으니 왕은 나를 머무르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혁치)왕은 놀라고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옛 종에 불상들을 안치하고 바다에 띄우면서 서원해서, “불상들과 종이 인연이 있는 국토를 향해 가소서. 나는 수천 명의 권속과 더불어 마땅히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善神)이 되어 항상 이를 옹호(擁護)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백금(白金)으로 따로 덮개를 만들어 이 서원을 종 안에 두고, 다시 옛 덮개로 그것을 덮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의 유점사에 월지왕(月氏王)의 사당이 있다.(〈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는 “종은 바다를 떠가며 여러 나라를 거쳐 금강산 동쪽의 안창현(安昌縣) 포구에 닿았는데, 이때는 곧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원년, 즉 한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기원후 4년)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려 사관 민지는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에서 《신라고기》를 인용해 신라가 불교를 처음 접했던 시기는 신라 제2대 남해왕 원년, 즉 서기 4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