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34 - 백령도 안전수호신, 장군석(將軍石)

2021.06.24 09:35:23 15면

 백령도 진촌에는 이름 모를 선돌(menhir)이 있다. 현재 주변에 정비되지 않은 채 초목들이 자라고 있어 관심 밖의 대상이 된 지 오래된 듯하며, 오히려 석재로 사라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이다.

 

약 4.5m 정도의 둔덕 위에 용기포 앞바다를 주시한 채 세워져 있는데 이름하여 진촌리 장군석 혹은 장군바위다. 전체적 모양은 상단부 끝이 뭉툭하고 하단부는 직육면체 꼴이다. 머리로 여겨지는 상단부의 3분의 1 지점은 잘려서 다시 콘크리트로 이은 흔적이 있으며, 측면은 손을 표현한 것처럼 파여져 있다.

 

▶장군석 위치 및 의미

 

장군석은 용기포선착장에서 진촌을 거쳐 두무진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 즉 백령로를 가다보면 용기포 끝섬 전망대(대용기원산)로 향하는 갈림길(삼거리)에서 끝섬 전망대 방향으로 150m 지점 도로 왼쪽에 위치한다.

 

왜 장군석이라 불렀을까? 특정한 우리나라의 유명한 장군을 칭하는 것도, 백령도와 관련 있는 인물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며 아마도 형상이 장군(사람)의 모습을 닮아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의 하루방 같은 정교한 모습은 아니나 그런대로 사람의 형체라 볼만하다.

 

혹시 연평도에서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것처럼 지역주민들의 염원을 담아 세워놓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세워진 위치로 보아 사람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지만, 진촌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이 틀고 앉은 모양’이라 해서 부르는 용기포. 현대에 들어와 백령도의 관문 역할을 하는 항구이고 첫 번째 통과 마을이 진촌이다. 그래서 의미가 더욱 심장하다.

 

▶선돌, 즉 장군석의 특징

 

2가지 정도로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첫째, 암질이다. 백령도의 가장 흔한 석재는 두무진, 콩돌해안, 용기포, 사곶 등 해안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글동글한 형태의 표면이 매끈한 사암과 규암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이 장군석은 입자가 굵고 표면이 거친 화강암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질이 아니며, 황해도에서 일부러 갖고 들어온 석재라 전한다. 육지에서는 흔하지만 오히려 백령도에서는 산출되지 않아 특별한 목적을 위해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둘째, 장군석이 위치한 지점인데 이곳은 간척으로 매립된 땅이다. 진촌에서 용기포로 이어지는 논으로 경작되는 좁고 긴 들, 자연 지명으로 ‘한틀’이라 부른다. 현재의 논으로 경작하기 이전에는 갯골이 있어 바닷물이 마을 깊숙이 들어왔으며 현재는 논농사를 위해 수문을 막아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고 있다.

 

이웃 진촌 주민들도 한결같이 과거에는 바다였음을 증언하고 있어 이곳은 바닷물이 드나들던 입구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백령진지에도 안산이 대용기원산과 마주서서 진기(鎭基)의 수구(水口)라 기록돼 진촌 주민들의 전언과 일치하고 있다.

 

다만 갯벌 매립 시기는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섬 여건상 그다지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지 않다. 결국 장군석은 한틀지역이 매립된 이후 간척지 위에 세웠으며, 진촌 입구(수구)에 바다를 바라보며 바닷물과 가까운 지점에 세웠다는 점이다.

 

▶건립 목적

 

우리나라 선돌은 대체로 얽힌 전설이나 신앙과 관계있으며, 예배의 대상물로서 성격이 본질을 이룬다. 건립 지점은 대부분 마을 어귀 같은 평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간혹 낮은 구릉 위나 비탈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일반 육지가 아닌 백령도라는 섬 지역에 건립했다는 점이 특이한데 1970년대 편찬된 백령도 자료를 통해 장군석에 얽힌 2가지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는 “본도에 옛날 첨사 시대 백령진을 설치했을 때 진의 전면이 너무 허하다고 해 황해도 해주에서 장군석을 만들어 옮겨다 세웠다고 한다. 그 이후 망쟁이(맷돌을 만드는 사람)가 이 장군석 윗면을 절단하려고 하니 장군석에서 피가 갑자기 흘러서 자르지 못하고 망쟁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인지는 모르지만 장군석 윗부분이 절단된 상태로 쓰러져 있었던 것을 복구하면서 떨어졌던 윗부분을 시멘트로 복원했다.”

 

둘째는 “퇴조비(退潮碑, 해일 등 바닷물로부터 재해 방지 염원을 담아 세운 비)로서 바닷물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세웠다는 것이다. 퇴조비는 동해안에도 있다는 설이 있으며 바다와 인접한 곳에는 있을 만한 전설의 한 토막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세워진 위치를 직접 살펴보면 퇴조비(退潮碑)라는 전설도 충분히 상상될 수 있다고 본다”고 적고 있다.

 

돌을 다듬어 사람을 형상화한 장군석. 이 장군석은 지금도 촌로들에 의해 전설이 전한다. 섬에 살면서 늘 바다와 밀접한 생활을 했기에 가장 빈번하고 두려웠던 바닷가 자연재해를 막아보고자 주민들의 정성과 염원을 담아 진촌 마을 입구에 건립했다.

 

이젠 미신으로 치부되는 민간 신앙, 과거 서낭당, 당산, 당목 등은 잊혀지고 있으나 지금도 마을마다 가장 친근한 산이고 주민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마을 주민의 안전과 풍어 그리고 만선의 기쁨,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이 바라는 목표이기에 의식과 형태는 변화되겠지만 마음은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백령도만의, 백령도를 위한 장군석은 잘 정비되고 보존돼 마음속 안전 수호신 역할을 이어갈 수 있게 관리돼야 할 것이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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