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69 - 대청도 고래잡이 이야기(3)

2022.04.07 08:30:01 15면

 1986년 1월 1일자로 국제포경위원회(IWC, 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가 상업적 포경을 전면 금지하면서 그동안 ‘로또’라 여겨졌던 울산 장생포의 고래잡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장생포. 고래는 사라졌지만 고래문화는 남았고, 이 문화의 전승을 위해 고래 문화마을이 조성돼 고래잡이 어촌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한때 지나가던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장생포의 고래잡이산업은 해방 후 1970년대가 전성기였다.

 

고래를 잡으면 배 옆구리에 찼으며, 항구에 들어올 때는 뱃고동을 울렸다. 배마다 뱃고동 소리의 차이가 있었기에 부인들은 남편의 귀항 여부를 판단했고, 마을 주민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나와 구경했으니 동네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배가 입항하면 고래는 곧바로 해체장으로 이동했다. 장생포 고래잡이의 일부 내용이다. 그렇다면 대청도의 풍경은 어땠을까?

▶ 대청도 고래잡이의 풍경

 

대청도 고래잡이의 중심지, 선진동에 거주하는 김○수(90)씨의 전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고래잡이에 나가 포획에 성공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고래를 잡으면 선박의 좌‧우현에 한 마리씩 묶어서 입항하는데, 입항 전에 포획한 마리 수 대로 뱃고동을 울린다. 한 마리를 잡았으면 한 번, 두 마리를 잡았으면 두 번, 세 마리를 잡으면 세 번을 입항 전에 울린다.

 

뱃고동 소리를 ‘연주할 주(奏)’‘나팔 나(喇)’의 ‘주라’라고 말한다. 이 때 대청도 주민은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뱃고동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항구로 몰려들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고래와 해체 과정을 구경하고, 나아가 덤으로 고래 고기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모였다.

 

포경선에는 보통 12~14명 정도가 승선했는데, 배에서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사람은 선장이기 보다 오히려 포수에 가깝다. 포수는 고래를 잡는데 중심인물로서 고래의 발견, 이동 방향 예측, 발사 순간 포착을 통한 성공률 담보 등 막중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선장도 포수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 포경선의 대장은 포수였다.

 

고래를 잡는 기술은 두 가지가 있지만 대청도에서는 작살이나 그물이 아닌 포를 쏴서 잡는 노르웨이식 수법을 썼다. 뱃머리(선수)에 장착된 포를 발사해 포획하는 방법으로 고래에 적중하면 화약이 장착된 화살이 고래 내부에서 폭발해 고래는 생명을 잃게 된다.

 

부두에 도착하면 꼬리에 밧줄을 감아 뭍으로 들어 옮긴다. 고래를 해체하는 전문가는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뾰족한 징을 박은 전용 신발을 신고 고래 등위로 올라 지휘한다. 꼬리는 석탄 위에 올려 밤을 밝히는 조명용으로 쓰이며 해부에 전념한다. 해체 장소는 현재 대청보건지소가 있는 위치다.

 

▶ 대청도 동양포경주식회사의 포경 활동

 

일제강점기, 황해도 대청도 선진포항. 1918년 사업장이 설치된 이후 일본의 포경산업은 서막을 알렸고, 1930년대 초까지 상당히 활발하게 이뤄졌다. 1933년 11월 25일자 수산경제신문에 의하면 1930년대 초 포경실태는 매년 포경선(捕鯨船) 3~6척이 출항해 30~40여 마리의 고래를 포획했으며, 그 가격도 20만~3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1926년부터 1944년까지 대청도 연안에서 포획된 고래의 종류는 참고래, 대왕고래, 돌고래의 3종이 있으며 참고래는 432두, 돌고래 12두, 대왕고래 7두로서 주로 참고래를 잡았다.

 

포경업에서 가장 흔하고 잡기 수월한 참고래의 경우 1926~1933년 전국 총 포획수의 18~49%를 차지했고,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몸집이 큰 대왕고래도 대부분 대청도에서 잡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대청도의 포경업은 1934년부터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걷는데 1931년 5월 5일자 동아일보는 장연(長淵) 대청도의 포경수(捕鯨數)가 40마리로 지난해의 절반밖에 미치지 못하고, 가격도 마리당 1만 원인 것이 7000~8000원밖에 안 되는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이는 어획량의 감소뿐 아니라 세계공황의 여파로 고래 수요까지 떨어진 데 따른 것이다.

 

또 1935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일본포경주식회사의 대흑산도 기지에서 74마리의 어획고를 올려 포경업 사상 최고의 신기록을 수립했다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아울러 동년 11월 5일 일본포경주식회사가 군산 어청도까지 진출하고 군산 부근에 가공장을 설치했다. 이는 1934년 동양포경주식회사의 뒤를 이은 일본포경주식회사가 서해안 포경업의 주력기지를 대청도에서 대흑산도로 옮겼음을 나타낸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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