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훈의 백령단상-반세기 만에 들어보는 만복호, 그리고 가족의 삶

2022.05.11 09:00:23 14면

 두무진 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 횟집 상가 왼쪽에 ‘두무진’이란 표지석과 함께 콘크리트 기단부 위의 검은색 비신(碑身)에 새긴 비명(碑銘)이다. 그리고 기단부에 씌여진 작은 글씨의 내용은 접적지역의 가슴 아픈 묵직한 내용이다.

 

일부를 소개하면 ‘1970년 7월 9일 23시경 군사분계선 남쪽 4마일 해상에 갑자기 나타난 북한 괴뢰 함정은 평화롭게 고기잡이를 하던 우리 어부들에게 발포를 가하면서 우리 어선들을 북으로 나포해 가다. 이때 북괴에 잡혀가지 않기 위하여 결사의 노력으로 뱃줄을 끊고 도망하려던 최상일은 저들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라는 내용이다.

1970년 7월 발생했던 사건이었으니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전국적 규모의 사건이 아니기에 쉽게 잊혀질 지라도 주변 접적지역 도서민이나 가족에게는 평생 가슴의 멍이다. 필자는 작년부터 비석 속 인물의 유가족을 만날 계획을 갖고 있던 중 한 분이 이 섬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최근 댁에서 만나 살아온 인생 얘기를 들어봤다.

 

▶ 어린 시절, 결혼 그리고 남편의 사망

비석 속의 최상일(1933년생)씨와 미망인 이○경(1938년생)씨는 사항포 출신으로 한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웃사촌처럼 지낸 사이다. 사항포는 30여 호 정도 살았던 백령도 북단의 마을로 북한과 마주하고 있으며, 농토가 없어 주민 대부분은 바다에서 식량을 구했다.

 

이씨가 19세이던 1950년대 중반 두 사람은 결혼했으며, 아버지 이성봉씨(작고)가 일손이 필요하다는 집안 사정 때문에 데릴사위로 결혼했다. 최상일씨는 노래와 장구 연주에도 솜씨가 있었으며, 재담꾼이어서 당시의 만담가 장소팔과 같은 능력의 소유자라 평가받았고 책임감과 근면성실한 남편이자 가장이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1남 4녀의 자녀를 두었고,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 남편은 두무진에서 배를 타 고기를 잡았고, 그 수입으로 가족을 보살폈다.

 

그리고 사건 당일 한○조(작고), 이○찬(작고), 박○은씨(작고)와 함께 탔던 배가 ‘만복호’였다. 당시 7월에는 주로 홍어를 잡았고, 전라도까지 가서 직접 팔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한 번 배를 타면 10여 일 만에 귀가했고, 집에서는 이틀 정도 머물렀던 일이 되풀이되는 일상이었다.

 

그래야만 쌀을 살 수 있었고, 쌀이 없으면 말분가루를 먹어야 했다. 당시 생활을 생각하면 자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사건 당일은 평소보다 일찍 오후 4시경 두무진항을 출발했는데, 다음 날 예비군 훈련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출항 당일 밤, 바다로부터 들려온 총소리에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나오니 이웃 주민들이 웅성거렸고, 자세한 내용은 모른 채 남편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모든 선원이 귀항하지 못해 불안했다. 어제 출항이 영원한 이별이었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비석의 내용이었고, 나포된 이후 9개월 만에 생환된 동료 선원에 의해 당시 상황과 함께 남편의 죽음과 북에 매장된 사실도 알게 됐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통일이 되면 유골만이라도 찾아오겠다던 희망은 귀환한 선원마저 2년 전 모두 사망하면서 사라졌다. 젊어서 찍었던 가족사진도 없고, 이제 기억마저 희미하다. 당시 사고 이후 받았던 위로금(?)은 옹진군수가 준 2만 원이 전부였다.

 

▶ 가족을 보살피며, 고된 삶을 살다

사건 이후 집안은 어려워져 이웃의 보살핌과 나눔이 큰 힘이 됐지만, 시동생의 권유로 농토가 있는 북포리로 이사했다. 생계와 자녀교육을 위해 주로 농번기에 모내기를 다녔고, 하루 품팔이 일당은 볏(짚)단 20단이었다. 현금이 아닌 현물로 받은 이유는 이곳에서 볏짚이 귀할 뿐 아니라 내 집의 지붕을 새로 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무날은 일을 해야 지붕 수리가 가능했다. 어린 자녀는 학교 월사금을 못내 독촉받는 일이 허다했고, 본인에게 ‘학교’는 들어본 낱말에 불과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1970년 이후 가난한 살림에 자녀에게 제대로 배움의 길을 열어주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마음의 큰 짐으로 남아 있다. 이젠 반세기가 지나 아내와 자녀 누구에게도 가장의 기억 공간은 없다.

 

누구나 말한다. 세상 살기 좋아졌다고… 그러나 좋은 세상에 미망인 이씨에게 남겨진 것은 외로움과 병환이다. 자식만 생각하면 병원비 때문에 치료할 엄두를 못낸다는 이씨. 유모차 없이 하루라도 허리 펴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라며, 건강하길 기원한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김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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