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6일 성남고 야구선수 공도혁군이 눈물 흘리며 심폐소생술을 하여 한 생명을 살린 기사가 실렸다. 장하고 감동이다. 평소 보지도 않던 댓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모처럼 좋은 기사 읽게해준 공도혁군에게 감사하단 글들이 보였다. 같은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우리가 사는 공동체가 참 따듯하다고 느꼈다. 댓글의 공감력이다.
필자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연에오락 프로그램을 심의할 때다. 예능 프로그램에 뭐 그리 민원이 많은지. 민원은 일정 기간 안에 조치하고 그 결과를 당사자에게 알려줘야 하는 행정규정상 쓸데없는 안건이 많이 올라온다. 안보면 그만이지 뭐가 그리 시청하기 불편하다고 민원까지 접수하는지. 사회통념상 문제없고 프로그램의 구성상 필요한데도 왜곡 해석하여 내가 시청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의제기를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정치적 진영논리까지 끼어들면 더 이상의 상식적 해석과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이런 사람들을 요즘말로 프로불편러라 부른다. 신박한 신조어다. 맘에 안들면 불편하다는 프레임을 씌운다.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기위해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구시대적 발상이나 윤리적 감수성이 떨어진다 등의 비난을 한다. 이런 상황을 겪으면 창작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다.
프로불편러는 악플러의 개량종이다. 악플러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데 비해 프로불편러는 어찌됐든 궤변이나마 논리로 덧칠을 한다. 2019년 10월 설리 자살 이후 악플의 문제점이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 결코 표현의자유로 포장될 수 없는 흉악범죄인 악플을 제대로 보게 됐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댓글란이 아예 없다. 우리나라의 다음, 네이버, 네이트도 2019년 10월 이후 연예면의 댓글을 닫았다. 영국의 가디언지도 2016년부터 이민, 인종, 이슬람 등의 기사에는 댓글을 달수 없게 막았다. CNN, BBC 또한 댓글이 불가다. 표현의 자유에 민감한 이들 국가에서마저 이러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대중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버마스는 시민들의 자발적 정치참여를 강조하면서 그 기능을 위한 공론장의 필요성과 역할을 주장하였다. 인터넷 보급 초기에 바로 인터넷이 그 공론장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현실은 기대로부터 멀어졌다. 공론 활성화를 위해 도입한 댓글이 악플로 말미암아 오히려 공론을 위협하고 있다.
댓글은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1%도 안되는 사람들이 단다고 한다. 댓글과 악플이 전체 민심과 여론을 결코 대변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하다. 2019년 11월 SM C&C 조사에 의하면 악플을 다는 이유가 20대는 불만, 비동의 30, 40대는 스트레스 해소, 장년세대는 질투, 시기, 부러움이 제일 높은 비율이었다. 특정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은 악플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처벌수위 강화와 처벌 구성요건 완화를 1순위로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스스로의 시민의식을 고양해야 한다.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각자 자신의 몫이다.
내 인생 격조 있을거냐 악플이나 달고 프로불편러로 살거냐 하는 것은 법을 떠나 오직 자신의 판단이고 자신의 인생살이다.
공도혁군의 심폐소생술 기사와 거기에 남긴 댓글에서 우리 사회의 따듯함과 건강함을 읽었다.
선플 한마디가 우리를 살맛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