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휘의 시시비비]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

2022.09.21 06:00:00 13면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인정(人情)을 중시해온 우리의 전통적 법 감정을 대변하지요. 역사 속에서 우리의 법치는 기본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모두 인간적으로 인식하는 온정주의(溫情主義)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아무리 큰 죄를 짓더라도 진정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면 쉽게 용서하는 게 우리의 양속(良俗)처럼 돼 있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세상이 이만큼 평화로울 수 있었다고 해석하는 건 별문제예요.

 

‘주취감경(酒臭減輕)’이라는 게 있어요.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의 경우 죄인의 심신미약을 인정하여 벌을 가볍게 해주는 조치이지요. 범죄자의 사정까지 헤아리고 살필 정도로 온정주의가 법치의 한복판에서 위력을 발휘해온 것은 어쩌면 미덕일 거예요. 그러나 범죄가 날로 지능화하고 흉포화하는 오늘날 이런 느슨한 풍조는 정말 괜찮은 걸까요?

 

지하철 신당역에서 여성 역무원이 자신을 스토킹해 오던 동료 남자 직원으로부터 살해를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어요. 쉽게 얘기하면 악마적 성품의 남자가 일방적인 구애 끝에 ‘짝사랑’하던 여성을 잔인하게 죽인 사건이에요. 잊을만하면 발생하곤 하는 유사한 강력 사건들을 보노라면 현행법과 제도가 세태 굴절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건 확실한 듯해요.

 

무고한 국민의 억울한 희생이 나올 적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고관대작들이 난리법석을 떠는군요. ‘반의사불벌죄(反意思不罰罪)’가 화두로 떠올랐어요.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처벌할 수 없는 범죄’를 말하는데, 스토킹 범죄도 그 범주에 있다네요. 이번에 희생당한 여성도 착한 온정주의 때문에 결국은 귀한 목숨까지 내주어야 하는 참혹한 희생양이 됐고요.

 

우리가 믿고 사는 치안의 그물은 생각보다 촘촘하지 못한 게 분명해요. 매번 사후약방문 형식으로 등장하는 다짐과 구호들이 이젠 별로 미덥지 않은 헛소리처럼 들려요. ‘주취감경’, ‘반의사불벌죄’ 폐지를 놓고 한바탕 소동이 일고 있네요. 이렇게 금세라도 뭔가 바꿔낼 듯 설레발치다가 어느 순간 또 망각의 늪 속으로 다들 줄행랑치는 건 아닌지 벌써 걱정이 드는군요.

 

물질적 풍요 뒤 제대로 된 가정교육조차 사라진 세상에서 포악한 정신병자들은 자꾸만 늘어나는, 예측 불가의 험궂은 세상이 돼가고 있어요. 이제는 무른 온정주의로는 어떤 위험도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 같네요. 서른한 살 전주환의 몸서리치는 스토킹 범죄 앞에서 속수무책 떨다가 그예 참살을 당하고만 피해 여성을 살릴 수 없었던 치안 허점을 좀 더 냉정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파고들어 개선해내야 해요. 위급을 호소하는 국민을 끝까지 보호해주지 못하는 공권력이 무슨 소용인가요? 제발 핑계 같은 건 대지 마세요. ‘반의사불벌죄’만 들어내면 이 비극을 끊어낼 수 있다고 믿는 건 위험한 착각이에요.

안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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