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의 달리는 열차 위에서] 월드컵, 개와 늑대의 시간

2022.12.06 06:00:00 13면

 

12월 2일 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대표팀이 포르투갈과 맞붙는 시간을 앞두고 저녁반주에 얼콰해진 나는 고민했다. 축구를 볼 것인가? 잘 것인가? 당일로 예정된 철도노조의 파업은 잠정합의가 나와 철회되었다. 고로 내일 새벽 예정된 기관차승무를 위해 출근해야 한다. 잘 시간도 문제지만 더 큰 고민은 지금껏 대한민국 축구가 중요한 경기에서 내가 중계를 지켜볼 때 이겨본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 축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끊기 힘든 응원유혹이지만 차라리 안보는게 우국충정이니 이 징크스를 익히 아는 지인은 술먹고 일찍 자란다. 그래,. 애국하는 심정으로 잤다. 현실은 늘 드라마보다 극적이라더니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대한민국을 또 한번 구한게야”라는 뿌듯함을 얻었다.

 

그날 새벽부터 지금까지 뉴스는 태반을 붉은악마들의 기적이 차지했다. 마치 월드컵경기 없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냈나 싶을만치. “그래, 월드컵이니깐..”하면서도 지나친 들뜸을 스스로 경계하게 되는 것은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미안함 때문이다. 솔직히 파업철회 소식에 내 가슴은 물먹은 솜마냥 무거웠다. 파업현장에 고립된 채 홀로 십자포화를 견뎌야 할 화물연대조합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추가 업무개시명령을 검토한다, 화주들의 손배소송을 대행한다”등 정부와 집권여당의 살벌한 말들이 언론에 도배된다. 심지어 용산에서 스승으로 모신다는 천공이라는 도사는 “노동자 없애면 데모가 없어진다. 대한민국은 노동자를 없애야 한다”고 일갈했단다. 아..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단 말인가?

 

파업을 좋아서 하는 노동자는 없다. 파업은 전쟁과 같아서 치명적인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파업도 정치도 국민들의 지지가 좌우하는 것, 월드컵이 모든 것을 삼켜버린 지금 길거리 화물연대조합원들의 막막한 가슴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전국이 “대~한민국!!”이란 함성에 뒤덮힌 가운데 법원은 서훈 전국가안보실장에게 서해공무원 사망사고 관련으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손흥민이 질주하기 몇시간 전, 검찰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우리가 월드컵으로 들썩일 때 그렇게 많이 해먹었다는 대장동 도적들은 모두 풀려났고, 풀려난 자들은 하나같이 검찰과 입을 맞춘 듯이 "이랬다 하더라", "저랬다고 들었다"는 말들로 야당대표를 겨냥했다. 그리고 그들이 비우고 나온 구치소의 빈자리를 이재명의 사람들이 메꾸었다. 검찰이 청구하면 법원이 발부하는 속칭 ‘구속영장 자판기시스템’은 또 누구를 겨냥할 것인가?

 

검찰왕국이라 불리우는 정권은 검찰권을 지렛대로 화물연대파업 강경대응과 전정권 수사, 이재명대표 수사를 디딤돌로 지지율 반전을 노린다. 지지율이 확보되면 민주당내의 호응세력과 더불어 정계개편까지 밀어붙일지도 모른다. 이 과정들이 월드컵의 열광을 등에 업고 탄력을 붙이고 있다면 내가 너무 민감한 탓일까? 땅거미 내리는 황혼녁, 언덕 위에서 다가오는 동물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날 물어뜯을 늑대인지 분간이 어려운 때를 일러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일컬었다. 월드컵의 눈부신 열정이 사그라들고 나서야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이 개의 시간이었는지 늑대의 시간이었는지를.. 


그렇다고 매사에 진지충이 되어 월드컵을 보지말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처럼 무도한 시대에 그나마 월드컵이라도 보며 위안을 얻어야 할게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볼 때 보더라도 매 순간 깨어있는 정신으로 보자. 겁박에 내몰린 화물연대노동자가 눈물을 삼키며 다시 운전대에 오르듯이, 이태원 유족들이 피눈물을 뿌리며 길거리를 떠돌듯이 누군가는 고통의 강을 건너고 있는 시간임을 잊어먹지만 말고 보자. 그래야 늑대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테니 말이다.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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