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의 달리는 열차 위에서] 굴욕과 치욕의 경계에서

2023.03.14 06:00:00 13면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담함을 넘어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 여기저기 신문에 칼럼이랍시고 잡문을 끄적이면서도 ‘이런 글이 세상에 어떤 보탬이 되는가’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속칭 ‘검사정권’, ‘검찰왕국’ 치하에서 살아내기가 여간하지 않은 탓이다. 자기들만 가장 똑똑하고 정의로운 초엘리트집단이라 여기며 전횡을 휘두르는 형세는 그래, 집권했으니 권력놀이 한다고 치자. 또 정적제거에만 혈안이 된, 차마 두 눈뜨고 못봐줄 국내정치는 차라리 눈감으면 된다고 여기자. 그런데 3.1절 기념식에서 일제강점도 우리 탓이요, 침략자들은 이제 글로벌 협력파트너가 되었다고 하는데서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버렸다. 허나 이건 예고편에 불과했다. 강제징용배상문제마저 우리 기업 돈 걷어서 해결하겠다니 도대체 대한민국에 주권이 있기나 한 것인지 분노를 넘어서 부끄럽기가 이를데 없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에 국권찬탈을 항의하는 불길이 타오르자 조약체결을 이끌었던 학부대신 이완용은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이런 망발을 지껄였다.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유일하게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명사인 그는 나라를 팔아먹고(일본에게서 거금을 받았으니 팔아먹은게 맞다) 거부로 살았지만, 죽거나 끌려가며 일제치하를 견디는 것은 백성들의 몫이었다. 이완용은 돈이라도 받았다지만 윤석열정권은 왜 이런 셀프배상이란 무리수를 둬가며 굴욕적 해결에 목을 매달았을까? 

 

작년 9월 21일, 미국뉴욕에서 기시다총리와 윤대통령이 만났을 때 일본은 간담회라 깎아내렸다. 짧지 않은 만남이었음에도 굳이 회담이 아니라고 한 이유는 양국간 최대현안인 강제동원 피해자소송문제 해결에 진전 없이는 정상회담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아사히신문은 “안 만나도 되는데 만나줬으니 한국은 일본에 빚을 졌다”고 표현했다. 3월16일 한일 ‘정상회담’을 합의한 이면에는 그때까지 강제징용 소송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이 있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것이 굴욕이든, 치욕이든 말이다. 굴욕과 치욕은 다르다. 굴욕은 욕됨을 견디면서 사는 것이다. 참혹한 일을 당해도 남의 탓으로 돌리고 한탄할 따름이다. 치욕은 처절한 부끄러움이다. “이렇게 비굴하게 마지못해 사느니 차라리..”라는 자각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서 굴욕은 반복되고 치욕은 표출된다.

 

이완용은 상소에서 덧붙였다. “더구나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조롱하고 있었다. ‘정 꼽으면 백성이란 개돼지들이 죽도록 싸워보든가’ 하고.. 백이십년 후 정권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강제동원셀프해법의정서’를 내놓고 ‘그래서 어쩔건데?’라고..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라지만 세상은 고쳐 쓸 수밖에 없다. 치욕을 느낀다면 그때는 개돼지로 살아가게끔 만들어진 세상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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