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0일은 윤석열 정부 출범 1주년이었다. 언론 지상에 그러한 1년의 성과와 과오를 분석하는 특집 기사들이 넘쳤다. 기사마다 빠지지 않은 것은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심각한 퇴행 상황이었다.
1주년 당일, 보수의 아성이라 불리는 대구에서 터져 나온 시국선언은 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총체적 평가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 도시의 25개 시민단체는 이렇게 단언했다. “민생을 파탄시키고, 민주주의를 짓밟고, 평화를 파괴하는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는 투쟁에 모두가 나서야 한다”.
왜 이토록 혹독한 평가가 나올까. 3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불통(不通)이다. 필수적 대화 상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취임 1년이 지났는데도 제 1야당 대표와 공식 회담을 갖지 않은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상 윤석열 대통령 밖에 없다. 서열과 관례 상 하위에 있는 야당 원내 대표 혹은 국회 상임위원장들과 만남은 적극 제안하면서도 정작 당 대표는 제외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당시 야당 총재는 집권 기간 내내 격렬히 충돌했다. 그럼에도 무려 7차례나 공식 회동을 했다. 삼권 분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소통과 타협은 대통령의 절대 의무다. 안 하고 싶다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질까. 자기주장만 설파하고 남 의견을 듣기 싫어하는 일방주의 때문이다.
바다 건너 일본 총리와도 공식적으로 2번이나 회담을 가지지 않았는가. 좁쌀 같은 포용력에 대한 비판이 여기에서 나온다. 감정적 대응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정책 협력 대상인 야당을 무시하는 행태가 곧 민주주의 본질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불안(不安)이다. 이태원 참사로 대변되는 사회 안전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외교 안보 영역이 불안하다. 2000년대 초반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는 국제사회에서 ‘부시의 푸들’이란 별명을 얻었다. 윤석열 정부의 대외정책은 어떤가. 가히‘미국과 일본의 푸들’로 불러도 과언이 아닌 1년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의 총대를 매고 스스로 한미일 삼각동맹의 첨병이 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갈등이 격화되고 한반도가 급속히 충돌과 균열의 신냉전 국면으로 내몰리는 중이다.
문제는 이러한 편향 외교와 맞바꾸어 일본의 고의적 역사책임 망각과 회피를 대통령이 앞장서서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문제적 발언이 이를 상징한다. 가해자의 논리에 오히려 힘을 보태고, 역사적 피해국가의 수장으로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언사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태도는 곧 미래 행동의 예고다. 이러한 역사인식이 어찌 불안하지 않으랴.
셋째는 불신(不信)이다.
4월 말의 워싱턴 국빈 방문에서 희대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정상회담 후 대통령실 핵심 책임자가 미국과 한국이 ‘사실상의 핵공유’를 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자 미국이 바로 그것을 받아서 부인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가관인 것은 이러한 미국의 반박이 나오자 “(핵공유) 용어에 대해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어이없는 견강부회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대통령실의 해명을 믿는다 해도, 이 같은 기괴한 논란이 나라 바깥에만 나가면 터져 나오는 것을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언론과의 관계도 상호불신으로 가득하다. 대통령 후보자 신분으로 참석한 2022년 4월 신문의 날 축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언론과의 소통이 국민과의 소통”이라 강조했다. 하지만 1년 동안 그의 실천은 정반대를 향해 달렸다.
비판적 언론에 대해서는 불신을 넘어 적대적 태도까지 취하고 있다.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사건과 관련하여, mbc 기자들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동승 불허가 이를 표상한다. 목하 외교부와 mbc 사이에 소송이 진행 중일 정도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언명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그저 5년 간 행정부 수반으로서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난 1년간 윤석열 정부의 3가지 불(不)이 이끌어낸 재앙적 결과를 생생히 목도하고 있다. 비 선출 검찰권력이 무소불위 핵심 통치 수단으로 등장했다. 노동, 문화, 표현자유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서 저항을 억누르고 비판의식을 위축시키기 위한 광범위한 공격이 본격화되고 있다.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과시적 행정의 커튼 뒤에서 (낡은 레코드판을 돌리는)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인구 소멸이 가속화 중이다. 대중국 수출 격감을 필두로 하는 무역수지 악화와 경기 후퇴의 악몽이 눈앞에 닥쳐왔다. 하지만 지난 1년과 같은 불통, 불안, 불신이 계속되는 한 위기 극복의 기대는 난망(難望)일 수밖에 없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를 멈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정권의 패배를 넘어 국민 모두의 패배라는 비극이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