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드족은 뉴스 속의 나라였다. ‘어린 소년들의 늙은 노래’를 듣기 전까지.
그 노래는, 개봉한지 10여년 지나 보게 된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4년 개봉/바흐만 고바디감독)’이라는 영화에 나온다. 언론 속에서 접한 쿠르드족의 이미지는 어떠했던가. 메마른 산악지역의 전사, 독립을 위해 늘 분쟁 속에 사는 투사… 그런 모습들이었다. 그 이미지 속에 아이들은 없었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고아가 된 다섯 남매의 이야기다. 가난만 남은 집안에서 가장이 된 열두 살 맏이 아윱에게 학교는 사치고, 설상가상 죽을 병 걸린 동생을 위한 수술비 마련이 발등의 불이다. 어린 누나가 수술비를 보태려고 이라크 노인에게 신부로 팔려갔지만 돈을 받지 못한다. 아윱은 유일한 재산인 노새를 팔기 위해 밀수꾼들과 함께 이라크 국경을 넘는다. 제목의 ‘취한 말’을 은유로 생각했는데, ‘험산 넘는 노새가 한파에 쓰러질까봐 미리 술을 먹여 추위를 못 느끼게 하는 행위’에서 나온 말이었다. 삶이 곧 전쟁인 이 다섯 남매 입에서 나오는 노래가 고울 리 있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트럭 뒤에 탄 아이들이 무심결에 부르는 민요 가사는 섬뜩했다.
‘인생이라는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고 나이 들게 하면서 저승으로 이끄네’
영화 속 삶, 노래 속 비탄은 쿠르드족의 현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이다.
기원전 9세기, 말 다루는 신공으로 기세를 떨쳤던 서아시아의 강대국 메디아 왕국(현재의 이란 북서부 지역)의 후손이며 12세기 십자군 전쟁에서 영국 리처드 1세의 군대를 격퇴한 영웅 살라딘의 후예가 어쩌다 이렇게 나라 잃은 떠돌이들이 됐을까.
국가는 세우지 못했으나 중동의 요지,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 접경의 산악지대에서 단일 언어, 단일 문화의 자부심을 갖고 살던 3000만 명 넘는 쿠르드족.
그들도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꿈꾸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에 속했던 쿠르드족은 ‘독립국가를 만들어주겠다’는 영국 등 연합국의 꼬임에 넘어가 연합국의 적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싸운다. 그러나 약속한 땅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영국은 얼굴을 바꾸고 심지어 영국령 이라크로 만들어버린다.(이때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소련과 미국이 배턴을 넘겨받는다. 소련은 쿠르드족이 이란 북부에 ‘쿠르드 공화국’을 세우도록 돕더니, 막상 이란이 반격하자 모른 체 한다. 피바람만 불고 독립은 무산된다. 미국의 배신은 대하 드라마급이다. 1972년, 이란, 이라크 분쟁 때,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 2014년,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때, 2019년, 시리아 내전 때, 독립의 약속을 믿고, 미국을 위해 전쟁 총알받이가 되어 싸운 쿠르드족에게 돌아온 것은 미국의 배신과 독립의 물거품이었다.
쿠르드족 오래된 속담, ‘산만 있고 친구는 없다’는 말이 역사의 예언처럼 들린다.
월드뮤직을 강의하면서 늘 안타깝게 느낀 것은 세계인들이 공감하고 좋아할 쿠르드족의 음악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 그들의 참상을 알리고 우리가 함께 할 길을 모색하고 싶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