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봄과 함께

2024.03.19 06:00:00 13면

 

잘 우려낸 녹차 한잔을 마시고 책상 앞에 앉는다. 글을 써 무슨 의미를 찾겠다는 것인가! 나이 먹음에 싱숭생숭 해지는 고갯마루가 있다. 아마 그때가 나이 든다고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나이 듦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누구는 쭈굴쭈굴해진 피부, 누구에게는 평온해지는 얼굴, 또 누구는 건망증, 누구는 지혜로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 듦을 반가워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마음이 풀기 가신 풀잎처럼 버석대던 그날, 두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다음은 커피 집이다. 평화동의 어느 외국인 체인점이 좋다고 들렀다. 몸이 국내산이어서 그런지 커피는 위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들과 같이 커피를 시켜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2층에서 마시다 1층의 주문매장으로 갔다. 혹 종이컵 있으면 하나만? 하니, 한마디로 없단다. 유리잔이라도 좀 빌려주면- 하니 ‘안 됩니다.’이다. 물을 한 컵 먹을 수 있느냐? 고 하니, 그 또한 안 된단다. 아르바이트 학생 같은 그녀는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결국 천 삼백 원을 주고 물 한 병을 사들고 서양 독재자본가 앞에 동냥하는 꼴이 된 심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나도 몰래 ‘이 나이에 이런 인간대접을 받으며 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한 친구가 영화 감상을 제안해 영화상영관으로 갔다. 액운은 겹쳤다. 두 사람은 주민등록증이 있는데 한 사람이 없어서 경로우대가 안 된단다. 평화동 인심은 아니구나. 사람의 나이야 얼굴의 주름과 머리와 외모에 나타나는 것인데 현미경을 들이대야 하고 국가가 증명하는 ‘증’만이 통한다니! 나보다 다른 친구가 먼저 돌아서서 나오고 말았다.

 

운전하는 친구의 의사에 따라 둘이 중앙동 M영화관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나를 알아보고 말하지 않아도 경로우대로 표를 주면서 3층 4관으로 가시어 편한 곳에서 보라는 친절함이었다. 한 고장에서도 사람 사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하면서 친구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영화가 끝난 뒤 친구와 좋은 기분으로 헤어졌다. 이왕지사 나는 팔꿈치가 아파서 한의원을 들렀다. 찜질도 하고 침도 맞고 계산을 하는데 원장이 웃으며 아프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간호사 손길이 어머니 손 같았다.’고 했다.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사람 사는 곳이 이렇게 웃으며 일할 수 있고 인간답게 대해준다면- 싶었다.

 

그날 저녁 TV에서는 공부 많이 한 의사들이 그들 심기를 건드렸다고 아픈 사람들을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한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평화와 행복한 삶을 우선으로 해야 할 정부는 ‘법대로’를 밝히며 법에만 의존하겠다는 뜻이었다. 자세히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나라에서 어디 기댈 데도 없이 북쪽으로는 핵무장을 한 위험한 반도의 반이 있지 않은가.

 

계절은 봄이다. 산에는 찔레나무 움이 참새 부리 같이 돋아 초록빛으로 벌고, 강물은 봄 햇살을 머금고 반짝인다. 생각을 가다듬으면 가장 외로운 나라에서 나도 외롭게 평생의 고독을 견뎌왔다. 그리하여 가슴속 슬픔의 정조(情調)를 지니고 사는 사람이다. 누가 잘나고 못나고 할 것도 없다. 누군가는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에 비하기도 했다. 봄과 함께 모든 국민들께서 유머가 넘치는 가운데 사랑하며 살아가는 분위기였으면 좋겠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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