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과작(寡作)의 감독 군에 속하는 오승욱 감독이 9년 만에 세 번째로 내놓은 신작 ‘리볼버’는 필름 누아르에 정통한 감독과 제작자(사나이 픽처스 한재덕 대표)답게 어두운 욕망과 비정한 관계, 하드보일드한(hard-boild : 냉혹한) 액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간의 평가는 저점을 오가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평자로서의 짐작으로는, 극의 결말 부분에서 감독과 제작자, 배우의 의견이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관객들도 그 부분에서 영화에 대한 전체 반응이 엇갈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영화의 완성도가 어떻다느니, 배우들의 연기가 어떻다느니 하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저급한 인상비평에는 동조하기가 어렵다. ‘리볼버’는 잘 만든 영화이고 나름 숨이 막히는 서스펜스가 있으며 이런 류의 영화 치고 속도도 빨라서 오히려 감독이 느린 작가주의 풍을 따라가지 않고 상업주의 영화의 흐름을 타려고 했다는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이 정도면 흔히들 ‘재미가 있다’고들 말한다. 게다가 조영욱의 음악은 ‘올드 보이’나 ‘신세계’ 때처럼 자신의 강점과 특성(클래식과 재즈를 오가는 크로스 오버 풍의)을 잘 살려 내고 있어 극적 긴장감을 배가 시킨다. 영화는 모자란 틈이 별로 없다.
아마도 일부 저널에서 야박한 평가가 나오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극중 인물인 ‘황정미’라는 존재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주인공인 하수영(전도연)은 정마담이라 불리는 정윤선(임지현)의 도움을 받아 황정미의 존재를 좇는다. 황정미가 자신이 간신히 (돈을 착복해) 마련해 놓은 아파트와 7억이라는 돈의 행방을 알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정미는 이스턴 프로미스라는 위장 조직의 본부장과 그레이스라는 총수 여인(김종수, 전혜진)에 의해 살해 당한 채 화종사(충남 청양의 화정사)에 묻혀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비밀은 한때 하수영의 애인이자 선후배 경찰 사이였던 임석용(이정재)이 알고 있었는데 임석용 역시 누군가에 의해 살해 당한 후 자살로 위장 처리된 상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임석용의 부사수 형사였던 신동호(김준환)이다. 여기에 그레이스 동생으로 잔혹한 짓을 일삼은 양아치 조폭 앤디(지창욱)까지 나온다. 영화의 기둥 줄거리는 외견상 하수영 대 앤디, 곧 덜 악한 자와 아주 악한 자의 대결로 구성된다.
바야흐로 영화 ‘리볼버’는 인물 관계가 씨줄날줄로 엮여 있어 다소 따라가기가 힘들 만큼 복잡하다. 극 중에서도 정 마담과 하수영의 대화가 이를 보여 준다. 정윤선이 말한다. “(설명하기가) 좀 복잡해요.” 하수영도 말한다. “그래. 복잡하네.”
하수영과 임석용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부패 경찰이었다. 유흥업소의 뒤를 봐주며 돈을 챙기다가 거기에 마약 거래까지 포함된, 비교적 큰 혐의의 범죄를 저지른 인물들이다. 당연히 수사망에 잡혔고 하수영은 7억을 받는 대가로 입을 다물고 모든 걸 혼자 다 뒤집어쓴다는 조건을 걸고 2년을 복역한다. 당연히 경찰복은 벗었다.
하수영은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을 몰락시켰다는 데 대한 분노와 원한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그를 완전히 미워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외롭고 화가 나 있으며 돈 때문에 절박하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한데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하다.
게다가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아파트는 임석용이 정윤선, 곧 정마담에게 증여를 했지만 정작 소유주는 황정미란 여인의 것으로 돼있는 상태이다. 그녀는 정 마담을 옆에 두고 황정미를 찾아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사람들의 불만은 이 황정미가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에 있으며, 또 왜 나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오승욱이 정작 노리고 있는 건 바로 그 혼선과 모호함이다. 황정미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맥거핀(Macguffin)은 영화에서, 일종의 눈속임 장치로 관객의 관심을 극대화하지만 결국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존재나 사건을 의미한다. 영국 출신의 유명 감독이자 서스펜스 영화의 대가인 알프레드 히치콕이 종종 사용했던 영화 기법이다.
그러니 황정미란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든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황정미는 무당(김혜은)의 신(神)딸로 돈이 엄청 많은 남자를 낚아 스위스 어딘 가로 도피해 있는 것으로 슬쩍 언급된다.
이스턴 프로미스 총수 그레이스 역시 무당의 또 다른 신딸이었으며 이 두 명이 조직을 놓고 경쟁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그레이스는 나중에 큰 비밀을 안고 있는 여자임이 드러난다. 어쨌든 황정미는 중요하지가 않다.
극중 인물들 모두 황정미를 좇고 있는 것이 중요하고 그중에서 결국 누가, 과연 누가, 그 실체를 깨닫거나 알게 됐는지, 그래서 돈 7억과 아파트를 차지하게 됐는지가 더 중요하다.
주지하건대 필름 누아르는 진실보다 욕망이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계열의 작품들이다. 누가 무엇을 저질렀든, 그리고 주인공이 누구를 사랑했든, 결국 각자의 욕망을 얼마만큼 실현했고 또 거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타협해 갔는가가 중요하다.
정의는 아예 없다. 정의로운 인물도 없다. 그래서 이런 하드보일드 누아르 영화는 비정하고 냉혹하다.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이 있을 뿐인데 그게 오히려 더 지금의 사회를 현실적으로 반영해 그려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리볼버’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리얼리즘의 영화인 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황정미의 존재, 그 실체를 알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에둘러서 말하자면 황정미는 임석용의 ‘사랑’이다. 그는 하수영을 걱정했고 사랑했으며 미안해했다. 그래서 그는 황정미란 ‘존재’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황정미를 그쯤으로 정리해 내면 영화 ‘리볼버’의 모든 줄거리는 단박에 이해가 간다.
그래도 불만인 관객들은 있을 수 있겠다. 현대 영화는 질문이 정확하고 답변이 명쾌하며 인물들 간 행동 동기가 뚜렷해야 하는 것이 철칙처럼 돼있다.
아마도 오승욱은 늘 그런 상궤(常軌)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연출자이고 바로 그런 점이 그로 하여금 첫 작품(‘킬리마낮로의 눈’)이 나온 후 15년 만에 두 번째 작품(‘무뢰한’)을 찍게 하고 또 9년 만에 이번 세 번째 작품을 찍게 만든 요인이 됐을 것이다.
영화를 대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작자 입장에서는 오승욱 감독은 통제하기 힘든 인물일 것이다. 이번 ‘리볼버’가 그의 영화 미래의 분기점이 될 듯싶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말 잘 듣는 감독이 될 것인가, 계속 고집스러운 연출자로 남을 것인가. 대중 입장에서는 이래도 피곤하고 저래도 피곤할 수 있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사실 하수영이 아니다. 정 마담이다. 이 여자야말로 누아르 영화의 필수 요소인 팜 파탈 역이다.
정윤선은 한편으로는 하수영을 돕지만(아마도 하수영이 감옥에 있을 때 임석용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고 두 여자는 한 남자를 고리로 감정이 엮여 있는 셈이다.) 이스턴 프로미스 본부장의 하수인으로 일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신 형사의 정보원이기도 하다.
정 마담은 양 다리가 아니라 세 다리를 걸친다. 화종사에서 극중 모든 인물이 모이는 이유 역시 다 이 정 마담, 곧 정윤선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녀는 하수영에게 또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언니. 나는요 언니가 요~만큼만 믿을 수 있을 거예요.” 이래저래 정윤선의 역할은 크다. ‘리볼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서브 텍스트들, 주변 인물들이 좋다. 임석용 역의 이정재도 사연 있는 눈빛 연기를 선보인다. 매력적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임석용의 선배로 지금 지병으로 죽어 가고 있는 전직 형사 민기현 역의 정재영이다.
민기현과 임석용은 한때 둘도 없는 짝이었고 그 사이에 하수영이 끼어들고, 또 게다가 둘이서 부패 경찰 짓을 해 먹었으니(민기현은 임석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자에 대한 욕망에 눈이 멀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기현은 하수영을 미워한다.
그러나 하수영이 출소 후 돈을 찾고 임석용이 왜 죽었는지, 그것을 파헤치는 전체 전략을 짜는 데 있어 민기현은 ‘뒷 배’ 역할을 한다. 임석용이 죽을 때 쓰였던 리볼버 권총을 하수영에게 전달하는 것도 민기현이다.
리볼버는 복수와 비밀의 실체를 상징한다. 더 중요한 것은 리볼버 안에 세 발의 총알만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세 발. 임석용의 죽음에 간여한 인물들은 세 명이거나 세 명 군(群)일 것이다. 그런 상징과 은유가 넘치는 작품이 ‘리볼버’이다. 잘 따라가야 한다.
영화는 종종 사람들의 뇌를 빠르게 회전시킨다. 뇌 회전만이라도 사람들은 건강해진다. 무슨 말인지, 어떤 까닭인지 다 모르겠다 한들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세상이란 해법 없는 질문과 사건이 연속되는 곳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드 보일드, 필름 누아르 영화를 즐기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