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에 웬 고사? 안 어울리게...” 축제의 개막, ‘고사’ 순서에 내로라하는 이들이 한복입고 나와 절과 술잔 올리더라. 이렇게 의아해 하는 축은 아무래도 젊은 층이다.
이태원 참사의 그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게 축제 아니냐, 그런데 왜? 멋진 파티, 잔치 분위기 축제에 꿀꿀하게 돼지머리에 절을 하다니, 대충 이런 볼멘소리다.
카니발(carnival) 피트(fete) 피에스타(fiesta) 피스트(feast) 페스티벌(festival) 주빌리(jubilee) 등 멋지게 들리는 외국 이름의 잔치라야지, 웬 고사야. 축제는 축제다워야지...
설레고 좋은 일, 상서로운 느낌이나 ‘노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이 그런 느낌 불렀겠다. 그런데, 말의 뜻을 보면 뜻밖의 사실과 만난다. 어떤 게 ‘축제다운 것’인지 그 본디를 볼 일이다.
문자(글자)에 그 뜻이 있다. 외국 산(産) 저 ‘파티’들의 의미도 다시 볼 일이다. 저 축제의 이름들은 여러 지역에서 자신들의 신(神)에게 뭔가를 바라는 기원(祈願)의 이름들이다.
세상의 어떤 유명한 신도 처음에는 자기 동네 특유의 (토속적인) 기원의 대상이지 않았던가.
종교나 신앙이라고 하는, 더러는 무속(巫俗)이라고, 좀 비하해서 미신(迷信)이라고도 하는 세계 각지의 그 믿음과 소망(의 표현)이 거의 한가지로 축제이고 카니발인 것이다.
오늘의 키워드인 축제(祝祭)는 축원(祝願)의 제사(祭祀)다. 신(神)에게 정성과 함께 공물(供物)을 바치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는 ‘노래하고 춤추고’와 같이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서양축제도 순교 성자와 같은, 공공(公共)의 또는 종교적 영광이나 이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이를 기리는 뜻이 주류(主流)다.
인류학적인 현상일 것이다. 아프리카 정글이나 중앙아시아 오지에 여태도 남아있을, ‘사람’ 즉 인간 의식(儀式)의 프로토타입(원형) 아닐까.
祝祭의 祝은 신에게 바라는 것, 祭는 제사다. 둘 다 신 즉 신성(神性)이 바탕이다. 그 신성의 간판은 보일 시(示)자다. 어원인 갑골문의 示는 제사를 위한 제단(祭壇) 그림이다. 神, 祝, 祭에 다 示가 있다. 축제를 (신에게) 알리는 제사(절차)인 고사(告祀)의 祀에도 示가 붙었다.
축제가 단지 ‘미친 듯이 놀아보자.’의 뜻이 아닌 것이다. 인간이 처음 자신의 신성을 깨달으며 빚은 제 아바타를 향해 진지한 다짐과 정성을 보내는 것, 하늘을 향한 절절한 비나리겠다.
처음 종교적 형태와 의식이 진화한 것이 ‘문화’이면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축제이리라. 장독대 정한수 향한 어머니의 새벽 기도를 떠올리자. 큰 예배당의 고등종교나 제도화된 문화가 아니라고 누가 비웃으랴. ‘나’의 본디는, 어디 언제 누구를 막론하고 중요하다.
축(祝)은 제단(示) 앞에서 기원의 언어를 말하는 큰 사람(兄 형님) 그림이다. 제(祭)는 그 형님이 손(又 우)에 고기(⺼,肉 육)를 들어 제상(示)에 올리는 것이다. 더 깊은 기쁨이겠다.
‘축제’란 말이 어긋나게 들리는 것은 글자의 (속)뜻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제대로 들어있지 않아서 생긴 현상일 것이다. 그들은 축제의 원래 서양말의 바탕에도 그런 제사의 뜻이 버티고 있는 점을 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 문명의 새벽부터 그랬으리라. 음식 등 좋은 것을 놓고 ‘존엄한 대상’을 향해 두 손 모아 비나리하는 간절함, (착한) 본성일 터다. 어느 종교건 저 본디를 되살려야 한다.
신을 향한 제사에 바쳤던 맛난 술과 밥 등을 다시 저를 향해 차리고, 축복의 상서로운 기운을 나눈다. 춤추고 노래하는 덕스러운 잔치로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다시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