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벽장에 숨기고 마음 졸이며 살아가는 아내의 마음과 자라면서 아버지와 마음껏 생활하지 못한 딸의 속상함이 김성녀의 표정으로 애절하게 다가온다. 매 순간 분장을 바꾸고 목소리를 바꾸며 연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천의 얼굴을 한 배우’라는 수식어가 떠오른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김성녀의 뮤지컬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이 막을 올린다. 후쿠다 요시노리 원작으로 극작가 배삼식이 우리 상황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2005년 ‘여배우시리즈’의 한 작품으로 초연해 많은 호평을 받았다. 배우 김성녀가 1인 32역을 소화하며 50여 년의 세월을 풀어놓는다. 초연 당시 올해의 예술상과 동아연극상 연기상 등을 수상했다.
극은 김성녀가 관객석으로 직접 걸어 들어와 말을 걸며 시작한다. 연기를 시작하겠다는 말과 함께 무대에 올라 이야기를 시작한다. 5살 정도의 어린아이는 벽장 속 누군가와 얘기를 하며 소련 노래를 부르고 엄마는 예전에 들었던 노래라며 옛날을 회상한다.
때는 일제강점기, 아무것도 모르는 14살 소녀는 16살 소년과 징집을 피해 결혼하고 해방 후 지식인이었던 남편은 빨갱이로 몰려 국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극심한 이념전쟁 속 남편은 겨우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지만 쫓기는 신세로 벽장에 숨는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지극정성 보살피며 억척스럽게 생계를 이어간다.
그 사이 태어난 딸은 벽장 속 아버지를 마음껏 부르지 못하고 서럽게 자란다. 아버지는 벽장 속에서 베를 짜고, 어느덧 자란 딸은 시집가는 날 아버지가 짜준 삼베 드레스를 입고 벽장의 갈라진 틈 사이에 선다. 시간이 지나 국가의 사면을 받게 된 아버지는 짧게나마 땅을 밟아보고 햇빛을 받는다. 벽장에 있었던 40년 동안 고생한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며칠 후 죽는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극의 핵심 메시지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들의 삶이 생생하다. 가난과 질곡, 부성애와 이념, 이상과 현실을 오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통의 우리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울분을 삭이며 베를 짜는 아버지와 산 사람을 두고 제사를 지낼 수 없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어머니의 삶이 비애를 느끼게 한다.
극작가 배삼식이 우리 상황에 맞게 각색할 때, 번안을 반대했던 원작자는 ‘또 하나의 작품’이 탄생했다며 극찬을 했다고 전해진다. 격동의 세월을 지나온 우리 역사에서 보통의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슬프다. 인간적인 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 그들의 삶이 더 애달프게 다가온다.
김성녀의 1인 32역 연기가 20년 저력을 보여준다. 5살 아이부터 청년, 노인까지 남편과 아내, 딸 역할을 모두 보여주며 관객들을 끌어당긴다. 2시간 동안 이어지는 이야기에 어느새 빠져들어 인물들에 동화된다. 중간 중간 관객에게 말을 걸며 연기를 이어가는 노련한 모습이 연극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새초롬하고 익살스러운 연기가 백미다.
극의 이야기와 또 다른 그림자 인형극 ‘열두 달 이야기’가 함께 진행돼 살아있는 모든 것은 남루하지만 아름답다는 극의 메시지를 전한다. 김성녀가 부르는 12곡의 노래가 연극과 뮤지컬의 경계를 넘나들며 울림을 준다.
이외에도 시공을 넘나드는 작품의 배경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연출가 손진책, 동아연극상 희곡상과 대산문학상 수상 작가 배삼식의 탁월한 각색, 2007년 서울무용제 음악상을 수상한 김철환의 음악, 박동우의 무대, 김창기의 조명이 어우러져 최고의 무대를 완성한다.
20주년을 맞은 김성녀의 ‘벽 속의 요정’은 11월 10일까지 총 10회 공연한다.
[ 경기신문 = 고륜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