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슬픈 경험이 지혜로 빛나기를

2024.11.18 06:00:00 13면

 

어느 작가가 여행길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그는 11월인데도 벚꽃이 피고 토마토는 착과가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농부를 만났다고 했다. 기후재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맞설 기술은 과거의 관성을 누가 먼저 깨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기후재난은 과학자들의 예측을 넘어서고 있는데, 권력자도 기업가도 과학자도 교육에서도 기후재난 앞에서는 누구 하나 용기 있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연기처럼 희미하게 그 문제 자체가 잊어지는 게 우선 당장은 다행이라는 것인가.

 

11월도 중순이어서 일까. 그동안 추위 걱정 않고 지냈으니 이제 기후재난 속 겨울의 길목에서 추위에 따른 체험적 경험을 쌓으라는 듯 바람은 차갑고 드세다. 온기가 없는 곳에서는 생명이 자랄 수 없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혼자 살 수 없도록 창조된 것일까.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정이 삶의 근원이요 문명과 문화의 기초되는 곳이라는 인식을 체감한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문득 걱정의 늪 속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있을 때 잘해’라는 대중가요 가사가 실감 난다. 글쓴이로 살아오면서 저렇듯 딱 부러지게 공감할 수 있는 유행가 가사 하나 없구나! 하는 자책도 따랐다.

 

나에게 희망이 있다면 아파트 옆 동에 살고 있는 딸에게서 ‘식사하러 오시라’는 그 전화요 목소리이다. 그것이 오직 가족과의 대화가 된 셈이고_. 나로 인한 딸의 수고가 고생이 되어 갈수록 안타깝고 애틋한 생각에 마음만 저리다. 그러던 어느 날, 딸 가정에 기념할 만한 일이 닥쳤다. 나는 전화로 모두 밖으로 나가 음식점으로 가서 식사를 하자고 말했다. 그랬는데 서로 간 소통이 잘 되지 않아 나는 끝내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녹음을 해놓고 들으며 반성해야 할 말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어 한숨을 놓게 되었다. 아버지와 딸이란 인연의 은혜 속에 가족이라는 이해의 이불을 하나님께서 덮어줌으로써 불행했던 순간을 여백이 공간으로 창조할 수 있었다.

 

세상을 걷다 보면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 풍경도 사뭇 다르게 보인다. 나같이 수양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많은 일을 자기 방식대로 통제하려 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통제에 응하지 않으면 순간의 적이 되기도 하는가 싶은 후회였다. 이런 상황일 때는 내가 나를 용서 못해 괴롭다. 이럴 때 이해의 담요와 이불이 필요한 것을_. 이 참담한 시대에 우울감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면 마음의 여백을 늘려가면서 바보처럼 살아가야 하겠거니 싶다.

 

바보도 바보 나름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백치요. 하나 밖에 모르는 사람은 바보다.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님이나 이태석 신부 같은 분들 앞에서는 ‘바보’라는 명사를 끄집어낼 수도 없다. 그래서 썩을 놈의 세상 ‘나는 완전 바보, 그대는 반절 바보’가 되는가 싶다. 바보로 살려면 힘(力)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아는 단 한 가지를 그냥 밀고 갈 수 있는 힘 말이다. 신앙이든 문학이든 그림이든 도공이든 소리꾼이든 말이다. 뚝심으로 자기의 명작을 위한 일생의 종착지를 향해 가는 것이다. 외로움과 피곤은 날마다 나비처럼 다가오고, 후회는 벌처럼 날아와 쏘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행복이라는 단어와 눈이라도 맞춰 볼 기회가 올 것인지 사뭇 안타깝다.

 

어느 날 먼 곳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 말 저 말 끝에 아들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시냐? 고 했다. 나는 ‘죽음 뒤의 희망’을 생각해 본다고 했다. 아들은 ‘제가 있는데 무슨 죽음 뒤의 일이냐’ 고 말했다. 아차! 내가 말실수했구나 싶어 ‘그래 네가 나의 자존심이다. 네가 있으니 좀 더 의미 있게, 가볍게, 유머러스하게 살아가야겠다.’고 진심어린 말을 들려주었다.

 

작가로서 살아오면서 글쓰기는 나의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작업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시간을 보내는 가장 멋진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지금껏 걸어온 길, 이 길에 깨어 있으리라. 갈아입고 겨울을 보내야 할 옷들을 세탁소에 맡기고 왔다. 때 묻고 추해진 옷은 세탁소에 맡기면 된다. 그러나 마음은 어디에 맡겨야 새롭고 맑아질 수 있을까. 봄 강물 흐르는 그 어디쯤일까… 아침햇살은 뒷산 이마에서 빛나고, 슬픈 경험은 지혜가 되어 가슴에서 빛날 것이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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