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그룹이 내년 1월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대응체제 마련에 나섰다. 외국인을 CEO(최고경영자)로 선임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오너가 전면에 직접 나서는 등 파격적인 인사가 특징이다. 또한 트럼프 1기 정부 당시 형성한 네트워크를 부활시키고, 해외 대관 조직을 강화하며 불확실성이 큰 국제정세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 15일 장재훈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은 완성차담당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호세 무뇨스 COO(최고운영책임자) 겸 미주대권역장을 신임 대표이사로 내정했다. 외국인이 CEO로 선임된 것은 현대차 창사 이래 처음이다.
무뇨스 신임 CEO는 도요타, 닛산 등을 거쳐 2019년 현대차에 합류해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북미·중남미법인장을 맡으며 북미 지역 최대 실적을 잇달아 경신했다. 북미는 지난해 현대차그룹이 165만 대 이상의 차량을 판매한 최대 시장이다.
또한 대외협력·정세분석·PR 등을 관할하는 그룹 싱크탱크 수장에 성 김 현대차 고문역을 사장으로 임명했다. 동아시아·한반도를 비롯한 국제 정세에 정통한 미국 외교 관료 출신인 부시 행정부부터 오바마·트럼프·바이든 정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핵심 요직을 맡았다. 올해 1월부터 현대차 고문역에 합류해 글로벌 통상·정책 대응 전략과 대외 네트워킹 등을 지원해왔다.
재계에선 현대차그룹이 현대·기아의 최대 시장인 북미 시장 대응을 위해, 4대 그룹 중 가장 먼저 사장단 인사를 실시, 서둘러 전열 정비를 마친 것으로 보고있다. 올해 1~10월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판매량은 603만 대인데, 이 가운데 미국 판매는 139만 대로 전체의 23%다.
또한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둔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 속 대미(對美) 전략을 강화하려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의지가 엿보인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당선인이 IRA(인플레이션감축법)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폐지와 모든 제품에 대한 10~20% 보편 관세 부과 등 바이든 정부와 크게 달라진 무역·통상 정책을 예고하며, 글로벌 자동차 시장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선제적으로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는 것.
그룹의 수장이 핵심 사업을 직접 챙기기 위해 계열사 최고위직을 맡는 흐름도 포착된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최근 핵심 방산 계열사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회장직을 새로 맡았다. 김 회장의 최측근 인사인 김창범 부회장도 새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김 회장이 직접 나서서 대미 방산 수출 기회를 잡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지난 5월 장남인 김동관 부회장과 함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방산부문 창원사업장을 방문하며 방산 사업에 힘을 실어준 바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세계적인 한국의 군함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다”며 ‘K방산 러브콜’을 보냈다. 특히 미군은 해외에서 자주포 도입을 추진 중인데,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폴란드로 대형 수출 계약을 성사시킨 K-9 자주포의 미국 수출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국내 재계 대표적인 미국통 인사로 꼽히는 김 회장은 앞선 트럼프 1기 취임식에 초대받는 등 ‘트럼프 인맥’으로 분류된다. 그는 트럼프 캠프에서 외교·안보 분야의 자문을 맡았던 에드윈 퓰너 미 헤리티지 재단 창립자와 오래 교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최근 SK하이닉스의 미국 낸드플래시 메모리 자회사인 솔리다임의 이사회 의장을 맡은 것으로 확인됐다. 솔리다임은 SK하이닉스가 2021년 11조 원 가량을 투자해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부를 인수해 설립한 미국 자회사로, 지난 2분기 첫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업계에선 트럼프 당선인이 선거 기간 중 AI 규제 대폭 완화, 민간 주도 AI 개발 장려 정책 기조를 보여준 만큼 글로벌 빅테크들의 AI 투자도 더 활발해질 것으로 내다본다. 솔리다임의 eSSD가 트럼프 재집권 시 증폭될 ‘AI 골드러시’에서 ‘곡괭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LG그룹도 이르면 다음 주 사장단 인사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주요 계열사들의 대표이사가 대폭 교체된 만큼, 다른 그룹에 비해 사장단 교체 폭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의견이다.
재계 한 고위인사는 “올해 재계 인사의 주요 트렌드는 조기 인사”라며 “미국 대선 이후 세계 경제 변화가 급격하게 나타나는 만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대비하려는 차원”이라고 했다.
아울러 4대 그룹은 해외 대관조직도 강화하며 인맥 구축에 나섰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해외 법인 관리와 현지 정·재계의 소통을 맡은 글로벌 대관조직인 글로벌퍼블릭어페어스(GPA)팀을 실 단위로 승격했다. SK그룹은 북미 대관 콘트롤타워인 'SK 아메리카스'를 바탕으로 트럼프 2기 인사들을 공략할 예정이다.
현대차그룹도 올해 초 해외 대관 조직인 'GPO(Global Policy Office)'를 사업부 급으로 격상시켰으며, LG그룹은 지난해부터 글로벌 대응 총괄조직인 글로벌전략개발원을 가동했다.
[ 경기신문 = 고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