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초 3박4일로 일본, 오사카에 회의 차 다녀왔다. 이 회의는 단순한 회의라기보다는 현장을 둘러보며 전문가들의 발표를 듣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역동적 모임이었다. 이름하여, “한일 예수회 사회 사도직 모임(Korea-Japan Jesuit Social apostolate meeting).” 한국 측 8명, 일본 측 11명이 모였다. 우리가 방문한 현장은 오사카의 노숙자와 쪽방촌 사람들의 무대인 “가마가사키”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2차 세계대전 후 판자집, 간이숙박소 등 저렴한 주거시설이 들어서며 도시 하층민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고 60년대 초까지 항만업, 제조업, 건설업 분야의 일용직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 하층 노동자들이 모여드는 노천 인력시장(요세바)이 서는 곳이었다. 90년대 초까지 일본의 3대 인력 시장의 한 곳이었다. 지금은 노동자들이 노령화되었고 노숙자도 숫자가 줄었다. 이 지역의 안 좋은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지역 주민들과 정부의 노력으로 깨끗하고 저렴한 숙박시설이 들어오게 되었고 국제공항이 가까워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방문하여 도시가 그 전보다는 아주 깨끗해졌다.
가마가사키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가마가사키’에 있는 일본 예수회의 사회사도직 활동 본부 격인 “여로의 마을(旅路의 里)” 근처를 돌아볼 때 나누어 준 한 쪽 짜리 안내서에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이 문구 하나로 “여로의 마을”의 아주 중요한 근본적인 정신을 알 수 있었고 특히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내용이어서 참으로 반가운 내용이었다: “가마가사키(Kamagasaki釜ヶ崎), 기독교 협우회(基督敎 協友會)”에 대한 간단한 설명인데, 일부를 짧게 인용하면: “~기독교의 정신에 근거해, ‘포교가 아니라’ 아이린 지역, 가마가사키에 사는 사람들의 존엄을 지키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활동을 하는 단체의 네트워크.” 이 중에 첫째, “포교가 아니라”와 둘째, “함께 살아가기”라는 두 문구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한국의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는 포교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예수가 초대 교종(교황)인 베드로에게 주신 “임무(mission)”에는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의 멤버십(membership)을 늘리라는 것은 없는데 굳이 임무(mission)를 포교, 선교, 전교, 전도로 번역하여 교회를 알리고 신자들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심지어 교회의 신자 수를 늘리는 것을 ‘의무’라고 가르친다. 십일조 봉헌도 의무라고 가르치니 신자들이 늘어나면 당연히 교회의 수입은 많아진다.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준 진정한 “임무(mission)”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양’은 겁이 많고 약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러니 예수가 제자들에게 맡긴 진정한 임무는 우리 주변에 약자를 돌보는 것이다. 둘째로 “함께 살아가기”는 주일 미사 때 혼다 신부님(프란치스칸)이 보여주신 그림과 설명에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 그림은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배식 줄에 서 계시는 장면”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의 눈으로 보며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서 머물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가난한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나 자신이 청빈 서원(vow)을 한 수도자이니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수도자가 아니라도 자원의 한계가 있는 이 지구에서 사는 모든 이들은 “공동의 집”인 “지구”의 환경과 우리 후세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태도이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은 지역을 막론하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삶의 실천적 행동 양식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