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없는 셀프 친위쿠데타로 정국이 안개 속이지만, 차라리 이번 기회에 한국 민주주의가 제대로 재건될 기회가 된다면 전화위복일 것이다. 할 말은 많지만, 올해가 넘어가기 전에 꼭 기록해야 할 일이 있다. 2024년은 우리 근대사 최고의 인물인 수운 최제우가 태어난 지 200주년의 해이다.
그의 학문 세계를 전공하는 연구자는 물론 한국적 윤리관과 민주주의 이념, 생명·생태사상. 페미니즘, 어린이 운동 그리고 소외된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는 법을 깨달은 모든 이들이 경축해야 하는 해이다. 필자는 단연코 수운 최제우를 우리 근대 최고의 인물이라고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의 근대 이후 학문적으로나 운동적 측면으로나 그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분야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운 최제우는 경주에서 유력한 선비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높은 학식을 가졌음에도 과거를 치를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좌절한 그는 주유천하 하던 중 도탄에 빠져 유랑민화 되는 백성들과 중국 중심의 세계관마저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더이상 성리학으로는 조선을 구할 방도가 없다고 판단해 새로운 학문을 만드니 그것이 1860년에 등장하는 동학(東學)이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은 하늘을 모신 위대한 존재라는 진리로 만민평등적 사고를 전파하니 우리의 고유의 독창적 철학이자 사상의 탄생이었다. 동학이 창도 됨으로써 우리는 자발적 의지로 전근대를 넘어 근대를 맞이한 국가가 되었고, 서구 열강의 무력을 앞세운 침략에 대항해 자주적 독립국가의 틀을 만들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학은 한국 민족주의 사상과 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수운은 동학을 몸소 실천하니 자기 집의 여종 두 명을 해방시키고 그중 나이가 든 여종은 며느리로, 어린 여종은 수양딸로 삼았다. 그의 행적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이 그를 뵙고자 모여들자 죽임을 예감하고 서둘러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정리하기 위해 남원으로 피신해 위대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저술하였다. 경주로 귀향한 뒤 체포되어 처형당했지만, 그가 남긴 동학은 한국 근대를 열었다. 저 유명한 동학혁명과 3.1혁명 그리고 일제하의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까지 그 연원은 동학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과언일까. 오늘 한국 고유의 문화와 사고를 바탕으로 창도된 동학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의 대표적 사상이자 정신이다. 한류가 유행하는 이즈음 한류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정신문화로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단연코 동학이다.
수운 최제우는 앞선 세대의 지식인이었던 실학자들이 개혁을 주장했지만, 책상물림에 머무른 데 비해 그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들고 그대로 민중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대상은 언제나 억압과 탄압의 대상이었던 민중이었다. 그들 가슴 속에 위대한 자각을 심어주어 스스로 나서서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보하고 백성의 안전을 지킴)과 이상적 지상천국 건설의 주역이 될 것을 역설하였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언제나 민중이 주체이고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연원은 수운 최제우의 동학이었다. 오늘 여의도 국회 의사당을 울리는 우리의 함성은 동학의 함성이다.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을 어쩌면 이렇게도 정확히 맞혀서 축하하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