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프랑스 문학 살롱 이야기] 프랑스 문학 살롱, 공론장의 신기원

2025.01.20 13:36:55 16면

살롱이란?

 

한국에서 ‘살롱’이란 단어는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풍기지 않는다. 아마도 룸살롱이 연상돼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살롱은 음성적 의미보다 양성적 의미가 크다. ‘살롱’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살롱(Salon)은 프랑스어로 응접실이나 서재처럼 방보다는 넓고 큰 공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폐쇄적 이미지보다 개방적 이미지가 더 많다. 17, 18세기 파리의 부유하고 저명한, 그리고 영향력 있는 여성들은 자택의 응접실이나 서재, 때로는 넓은 안방에서 사회적, 지적 모임인 ‘문학 살롱’을 열었다.

 

살롱은 예술, 문학, 철학, 음악, 정치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사교 모임으로, 전형적인 프랑스 문화 행사였다. 이는 수도 파리와 관련이 깊었고 넓은 인맥을 가진 부유한 여성들이 주최하는 경우가 많았다.

 

살롱에 모여든 손님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주적이고 국제적이며 관용적인 분위기 속에서 토론을 진행했다. 따라서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관점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됐다. 또한 새롭고 때로는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계몽주의적 사고를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점차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 도시와 북미로 퍼져 나가 문화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롱은 여전히 파리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사실 ‘살롱’이라는 용어는 18세기 들어 사용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사교계’라는 말로 통용됐다. 일반적으로 귀족 여성들이 주최하는 주간 살롱은 손님들을 위해 예약된 특별한 방에서 열렸으며, 손님들이 소그룹으로 섞여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살롱이 가장 꽃 핀 시기는 계몽주의 시대로 이때 파리에 생겨난 살롱은 60개가 넘는다. 여성들은 살롱을 통해 저명한 사람들과 철학, 정치, 과학, 예술,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격조 높은 대화를 나누고 교류했다.

 

이때 토론의 주제는 문학, 정치, 철학이 중심을 이뤘다. 여기서 혁명적 아이디어가 촉진되고 정보들이 생산돼 대중의 계몽에 큰 도움이 됐다. 살롱에 오는 손님은 대부분 상류층 부르주아나 귀족 출신이었다. 그들은 살롱에 모여 토론을 하고 자신의 견해와 의견을 나눴다. 많은 교육을 받은 이들은 정치, 시사, 지적 토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살롱은 사상과 철학을 논의하는 사실상의 대학과 다름없었다. 많은 살롱은 철학자나 작가가 자신의 신작 소설을 낭독하거나 새로 발견한 소설, 에세이 또는 철학적 텍스트를 읽고 토론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는 종종 살롱 주인이 주도하고 격려했다.

 

대화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살롱을 연 여인들

 

살롱의 역사는 대략 17세기부터 시작된다. 이때 파리의 일부 귀족 부인들은 궁정의 문화가 다소 천박해졌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더 이상 남성들의 무심한 태도를 참을 수 없었고 용기를 내 대화의 주도권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파리의 자기 집에 재치 있는 사무실을 차리고 ‘귀중한 여인들’이란 이름을 붙여 사교 모임을 열기 시작했다.

 

 

그중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 후작과 결혼한 랑부이예(Rambouillet) 부인이 운영한 사교모임이 가장 유명했다. 그녀는 이 모임을 파리의 지식인들과 프랑스 문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했다.

 

랑부이예 부인은 세련된 여성으로 파란색으로 치장한 ‘파란 방’에서 손님을 초대해 살롱을 최고 지성의 전당으로 가꿨다. 그녀는 당대 유명한 작가인 코르네유, 몰리에르와 같은 작가들을 초대해 작품을 파란 방에서 낭독하고 토론하게 했다. 그때 사용한 언어 중 어떤 단어를 삭제하고 어떤 단어를 대체해야 하는지 등의 토론 기회도 가졌다. 이 모임에 참석한 리슐리외 제상은 한 나라를 지배하려면 언어도 지배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언어를 보호하자고 제안했다. 여기서 프랑스 한림원인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살롱은 프랑스 대화 정신의 진원지가 됐고 이는 프랑스어의 발전과 순화에 크게 기여했다. 랑부이예 부인은 손님들과 자기 이름을 이용한 글자 놀이를 하면서 자신의 살롱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살롱에 초대된 사람들은 ‘좋은 매너’를 보여 줘야 하며, 그들 사이의 명백한 차이와 의견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쓴소리나 원망, 폭력적인 논쟁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들은 정중한 대화와 논쟁적인 토론의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손님들은 살롱에서 시를 쓸 뿐만 아니라 여흥도 즐겼다. 그들은 멋진 몸동작을 개발하고 실용적인 농담을 했다. 어떤 이는 한쪽 귀퉁이에서 서정시를 써서 공개적으로 낭독하고 어떤 이는 류트를 반주하며 아리아 몇 소절을 부르기도 했다. 프랑스 귀족들의 필수 장소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 새로운 살롱이 생겨났다. 살롱 여주인에 따라 진지함의 정도는 달랐지만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들어 살롱은 보다 공식화된 구조를 갖추게 됐고 문학, 학습, 토론에 더 중점을 두게 됐다. 프랑스 혁명 이전 살롱 시대의 토론 주제는 정치, 철학, 계몽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미국 혁명에 대한 보도는 1780년대에 많은 살롱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미국 독립선언서, 버지니아 권리선언서, 미국 헌법 등 미국 혁명의 중요한 문서들이 파리 살롱에서 연구되고 논의됐다. 벤자민 프랭클린이나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미국 외교관과 방문객들은 파리의 가장 권위 있는 살롱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살롱의 가장 큰 영향력은 살롱 여주인의 몫

 

살롱에서의 모임은 일관된 구조나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 살롱을 운영하는 여주인이 원하는 순서와 방식으로 모임을 관리했다. 살롱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누구를 초대할지 결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살롱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격렬한 토론을 유도하며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초대 손님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역사학자 스티븐 D. 케일(Steven D. Kale)에 따르면 살롱의 손님은 “가장 흥미롭고 조화로운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살롱 주인이 선정했다. 따라서 살롱 주인은 손님 개개인의 장점을 고려하면서도 전체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작업을 수행했다.”

 

살롱은 지적인 이유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교 행사였다. 따라서 살롱은 문화생활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 욜튼(J. W. Yolton)은 “모든 살롱에서 중심인물은 안주인이었으며, 종종 감각과 권위를 갖춘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그녀의 개인적인 매력과 사회적 야망, 조직력, 지성, 재치, 좋은 취향이 분위기를 결정했어요. 물론 안주인들은 매주 또는 격주로 열리는 모임에 초대할 사람을 선택하는 책임도 있었지요”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남성이 힘을 갖고 사회를 제아무리 지배해도 그들을 지배하는 건 여성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 글=최인숙 논설주간 ]

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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