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야성(野性)이 아쉽다

2025.10.23 06:00:00 13면

 

시를 공부한다는 여성에게서 문자가 왔다. 명절이 끝나는 마지막 날 카페에서 만나고 싶다고. 이어서 그는 수필을 공부하고 싶어 꼭 두 가지만 물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순간의 느낌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적인 풋풋한 야성(野性) 같은 감성이었다.

 

가을이 되면 강의실도 뭔가 달라져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가요를 한 곡 불러주기도 하고 악보를 나눠주면서 같이 부르며 가을날의 정서를 강의실에 담아내곤 한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 길 떠난 소녀 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 하고 앉으면/ 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 우는 바람 소리… ”

 

나는 이 노래 가사에 마음이 끌려 부르게 되었다. 작사가(김지평)의 마음과 내 마음이 포개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지리산을 의무적인 과업으로 알고 오르내리면서도 통나무집 창가에서 밤을 새우며 울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으면 숨어 우는 목소리 같은 바람소리며 젊은 날의 그녀 얼굴이 주름진 내 가슴에 안기는 듯해서 좋았다. 그러한 가슴과 눈빛으로 갈대의 몸동작을 바라보면서 산을 오르고 내리면 또 생각나는 일들이 있었다. 마당가에 첫서리가 내려 국화가 시들 무렵이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집 방 문짝에 새로 사 온 창호지를 바르고서 떼어낸 문짝을 담 곁에 세워놓은 뒤 함께 바라보시곤 하셨다. 그때의 두 분 모습은 퍽 편안해 보였다. 그 생각이 나면 지금도 ‘숨어 우는 바람 소리와 문풍지 소리며’ 가버린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며 공연히 쓸쓸해진다. 그러나 허전한 마음은 끝내 맑아지곤 한다.

 

부모님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때다. 그때는 강변에 나가면 건너편으로 노루가 뛰어가고 풀숲에는 큰 뱀이 똬리를 틀고 있기도 했다. 뒷동산으로는 아이들과 토끼몰이를 다니고 강물이 얼어붙어 스키를 즐길 때는 산 짐승들의 달아나는 모습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산과 냇가 그리고 강변 둑에서 풀을 뜯던 황소들은 한 폭의 야생(野生) 풍경화이었다, 산과 강과 사람이 같은 하늘 아래서 본능적인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었다. 어쩌면 사람도 야생동물 같이 산과 들과 숲과 마을에서 야성이 길들여져 살아가는 생명으로서의 개체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대형 포식자들을 멸종시키고 중소형 포식자를 가축화하는 역사였다. 그리고 현재는 전 세계 포유류의 36%가 인간이고, 60%가 가축이며, 오직 4%만이 야생 포유류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호랑이 표범 스라소니 같은 대형 포식동물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TV에서 가끔 시청했다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를 본다. 그 순간 넓은 초원에 서 있는 엘크 사슴이 나타나 턱 하니 버티고 서 있는데 보니, 짐승의 관(冠) 같은 뿔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무섭게 뻗었는데 곁가지 뿔이 10개였다. 그리고 약간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그 야성미! 야생의 본질은 ‘자유요 힘’이라는 게 절로 느껴졌다. 다듬어지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본능 그대로, 그대로, 생긴 그대로-

 

그때 생각나는 고사(古事)다. 한자로는 기호선인(騎虎仙人)이다. 어떤 사람이 깊은 산에서 갑자기 호랑이를 만나 엉겁결에 등에 올라타 꽉 잡고 있는데 호랑이가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줄달음치니 보는 사람들은 ‘호랑이를 타고 가는 신선’이라고 하더란다. 본인은 뛰어내릴 수도 없고 죽을 지경인데-. 이러한 이야기가 통하던 그 시절, 그때는 그만큼 야생동물과의 삶이 낯설지 않았으며 야성을 잃지 않고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쑥과 마늘만으로 100일의 고난을 견디고 꿈을 이룬 조상으로서의 시조 곰의 교훈도 기억해 볼 일이다.

 

하늘 맑은 계절이다. 하늘을 거울삼아 나를 깊이 들여다볼 일이다. 우리의 삶이 야성을 까맣게 잊고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지고 자본주의 하늘만 쳐다보면서 아파트 평수와 자가용에 갇힌 것은 아닌가 하고. 어린이는 일찌감치 동심을 잃고 의대, 법대, 과학기술반의 유아원에, 청년들은 일류대학과 일류회사를 위한 과외와 학원에 갇혀 길들여지고 다듬어지면서 땅 한 번 제대로 밟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더욱 자연의 저장고인 숲 속에서 심호흡 한번 해보지 못하고 세련된 신사요 숙녀로 매끄럽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이가 무거울수록 인간으로서의 풋풋한 야성(野性)이 그립고 아쉽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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