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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풀어본 무예]무예에 정답은 없다

 

무예 수련은 자신의 몸과 끊임없는 투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무예 자세라도 그것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수천 번 혹은 수만 번의 동일한 움직임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몸에 새겨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자신의 몸과 일체화 되면서 자신만의 몸짓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똑같은 자세를 배운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의 몸이 다르기에 그 움직임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제조건은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과는 다른 형태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일체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바로 나와는 다른 몸짓이지만, 그 다른 몸짓을 내 몸에 맞도록 몸을 변화시키는 것이 수련이라는 것이다. 고된 과정을 거치면서 무예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진화한다. 그런 이유로 무예는 과정은 있지만, 완벽한 정답이나 결론이 없다. 이는 복식이나 음식과 같은 생활문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더 아름답거나 혹은 더 맛있는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또한 시류 혹은 유행 속에서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예의 문화적 속성으로 인하여 무예를 배우는 목적과 의미에 따라 자세나 운동형태가 바뀌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린이들이 수련하는 무예는 살상의 형태를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놀이처럼 재미있게 수련내용을 조정하여 수련하는 것이다. 반대로 나이가 지긋한 노년층이 무예를 배운다면 투쟁력을 높이는 방식보다는 근력강화나 유연성 확대를 통한 신체능력의 유지에 핵심 목표를 두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무예를 배운다고 할지라도, 궁극의 목표가 달라진다면 변화하는 몸의 형태도 달라진다. 그러한 변화를 ‘다르다’는 입장이 아닌 ‘틀리다’라는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많은 충돌지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문장 중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말이나 의견에 대하여 ‘다르다’라는 입장과 ‘틀리다’라는 입장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틀리다라고 한다면 대화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

무예의 수련 과정에서 생기는 다름은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어릴 적 유년기의 추억도 다르며, 학교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공부하는 방식 또한 모두 다르다. 역시 성인이 된 후에는 제각각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공동체 속에서 교집합이나 합집합의 형태로 살아간다. 넓게 보면 지구촌이요, 작게 보면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와 ‘연대’의 의미를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며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나와는 다른 존재지만, 공통된 목표의식이나 지향점을 바라보며 함께 풀어나가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무예를 수련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한번즈음 의심해 보아야 한다. 어떤 공부든 간에 기본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확인하고 그 것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마치 ‘나는 이미 정답을 찾았으니,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네’라며 떠벌리는 것은 자신의 공부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由(유) 誨女知之乎(회여지지호): 유(由)야!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 주마.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是知也(시지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바로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모든 것을 완성했고 안다고 한다면 그는 진정 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 무예에도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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