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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열고관(閱古觀)과 개유와(皆有窩) - 上

 

어릴 때부터 책 속에 빠져 살아온 정조는 지식의 갈망이 높았다. 역사 이래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아왔지만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조선 후기에는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숙종 말기에 들어서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가 안정화 되면서 청의 서적들을 구매하기 시작하였으나 영조 말기에 청나라로부터 수입한 책에 태조 이성계를 깎아내리는 글이 발견되어 책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항상 즉위하면서 좋은 책을 구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다음해(1777) 2월24일(음력) 따스한 봄날 아침부터 까치 울음소리가 궐내에 펴졌다. 울음소리를 들은 정조는 서둘러 선대왕을 기리는 여러 제사건물에 가서 예를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4개월 전 청나라에 진하 및 사은사로 간 이은, 서호수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여 글을 읽어 내려갔다.

좋은 소식이었다. 정조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백과사전을 구했다는 것이다.

편지에는 “전하께서 명령하신 뜻대로 청나라에 와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계통으로 알아보니, 아직 책을 만드는 과정으로 정식 책으로 발간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자체적으로 차선의 방법을 찾아 해결하였습니다. …‘사고전서’는 ‘도서집성(圖書集成)’을 따라 그 규모를 확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 ‘도서집성’을 구하고 ‘사고전서’의 발간되면 그때 구매해도 좋을 것 같아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찾아냈는데 모두 5천20권에 5백2갑(匣)이었습니다. 그 값으로 은자 2천150냥을 지급했는데, 지금 막 실려 오고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었다.

‘고금도서집성’은 1701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726년에 완성되어 64부를 인쇄하였고 50년이 지나서야 조선은 이 책을 사들이게 되었다. 그만큼 조선은 국외의 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는 세계적으로는 10여 부밖에 남아있지 않아 희귀본에 속하며 그중 하나가 정조에 의해 수입되어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것이다. 이 책은 백과사전으로 여러 분야의 책을 보고 중요내용을 발췌하거나 전체를 인용하였는데 이중 허준이 쓴 동의보감의 내용이 33항목이나 인용되어 있어, 상호 의학에 대해 교류도 알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서적이다.

힘들게 구하여 조선에 들어온 ‘고금도서집성’은 귀하게 대접받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책을 만들 때 국왕이 보는 책은 특별하게 좋은 종이로 만들게 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책은 황제가 보는 용도가 아니므로 일반 종이로 만들었던 같다. 그리고 중국의 종이는 질은 우리나라보다 떨어지므로 정조는 이 많은 책의 표지를 새로운 종이를 사용하여 교체하는데 그 업무량이 얼마나 많은지 많은 사람 동원되었는데도 40일이 걸렸다. 또 유명한 일화로 5천여 권의 표지에 ‘도서집성’의 글을 쓴 사람은 당대 명필로 유명하던 조윤형인데 같은 글자를 5천번을 쓰면 도(道)를 트게 되었을 것으로 믿고 ‘도서집성’ 글씨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조윤형은 일전에 고찰했던 건물인 서향각의 현판을 쓴 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새롭게 표지를 단장한 청나라 책은 창덕궁의 왕립도서관 단지 안의 2층 건물인 열고관에 보관되었고 규장각 각신과 정조는 열심히 이 책들을 읽었다. 수원화성을 건설할 때 정조는 다산 정약용에게 설계를 지시하고 ‘고금도서집성’에 들어있는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전해주고 정약용은 이를 참고하여 성설을 만들게 된다. 수원화성이 기존의 방법과 달리 과학적으로 건설되어 공사 기간을 줄이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게 한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런 중요한 책이 일반인에게는 열람이 허용되지 않고 규장각 각신에게만 허용되어 지식의 보급에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정조가 그만큼 이 책을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했는지 짐작이 되며 다음 편에는 이 책을 보관하던 열고관과 개유와의 건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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