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가 히트를 친 적이 있었다. 그 광고는 어쩌면 우리들 마음 속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부자에 대한 열망을 대변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부자하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집이 있다. 바로 경주의 최 부잣집이다. 경주의 최 부자는 어떠한 이유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회자되고 있을까. 오늘은 최 부잣집이 있었던 경주 교촌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경주 교촌에서 가장 먼저 들려볼 곳은 당연히 최 부잣집이다. 집 앞 안내판에는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이라고 적혀 있는데, 실제로 1789년경에 세워진, 200여년이 훌쩍 넘은 경주 최씨의 종가이다. 부자 집 치고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것에 놀라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원래 99칸이었던 규모는 현재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 고방 등의 일부만 남아 있다.
최씨 고택에는 최 부잣집의 가훈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들 가훈들은 경주 최 부잣집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가훈들이다. 그 중 눈에 띄는 가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선뜻 이해가 안 되는 가훈이다. 하지만 이 가훈은 벼슬에 대한 과욕이 자칫 멸문의 화를 당할 수 있음을 알고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가훈이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당쟁에 휘말려 죽거나 귀양을 가거나, 심하면 역적으로 몰려 집안 자체가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현명한 처사다.
최 부잣집은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도 가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손님이라고 모두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손님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행색이 아닌 그들의 ‘문리(文理)가 트인 정도’에 따라 대접을 달리 받았다. 명품으로 치장을 해야 대접을 하는 요즘과는 사뭇 다른 손님대접 방법이다.
최씨 고택은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들렸던 곳이기도 하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는 신혼 여행길에 경주를 방문하여 최 부잣집에 머물게 되었다.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황태자는 ‘신라시대의 금관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으니 참여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에 경주까지 오게 되었다. 황태자가 당시 참여한 고분발굴에서 실제로 금관이 출토되었다. 이 금관에 봉황모양이 장식되어 있어서 스웨덴(瑞典)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고분의 이름을 서봉총이라 이름 하였다.
발굴 후 황태자는 최 부잣집으로 안내되어 사랑채에 묵게 되었다. 사랑채에 묵었던 구스타프 황태자도 최 부잣집의 안채는 들어가지 못했다. 안채가 얼마나 궁금했던지 그는 왕이 되고 난 후 한국전쟁에 지원병을 파견하면서 여 간호장교에게 안채를 꼭 조사해 오라는 특별한 부탁을 하였고, 간호장교는 실제로 안채의 사진을 찍어갔다.
최 부잣집이 새로 터를 잡은 경주 교촌은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이루어진 요석궁터로 알려져 있다. 최 부잣집이 교촌에 터를 잡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는데, 땅을 사고 집을 지을 준비를 다했지만 정작 향교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최 부자는 향교에 미곡 1천석을 기부하고 집을 지을 수 있었는데, 출입구는 향교와 다른 쪽으로 내고 용마루도 향교보다 낮추어 지었다.
최 부잣집에는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 있다. 경주에서 사방백리라 하면 경주 동해안일대를 시작으로 울산과 밀양, 북쪽으로는 포항까지를 포함하는 영역이다. 이렇게 방대한 영역에 자신의 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한 최 부잣집은 단순히 돈이 많은 부잣집이 아니라 자신들의 철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대대손손 무던히도 노력해온 가문임을 알 수 있다.
교촌에는 최 부잣집과 교촌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수 있는 교촌 홍보관과 최 부잣집에서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교동법주, 그리고 경주향교 등이 자리하고 있어 천천히 사색하며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고액의 로비자금 파문과 하루가 멀 다하고 쏟아지는 갑질 논란에 휩싸이는 요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할 현대판 최 부자가 등장하길 기대하며 경주 교촌을 거닐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