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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제니 홀저, 풍경 위를 고요히 흐르는 글자

 

 

 

 

 

요즘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갈 때마다 가슴이 벅차다. 평소 너무나 좋아하는 제니 홀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 층을 가로지르는 로비의 높은 천장에는 LED 기둥이 매달려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현대 여성 문학가 한강, 김혜순, 에밀리 정민 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속 문구들이 실린 사인물이다. 문구들은 전파를 타고 하늘을 향해 빠르게 상승하고 있고 기둥은 느닷없이 움직이며 길어졌다 줄어들었다 한다. 과천관에는 호수 다리의 대리석 난간에 제니 홀저의 아름다운 문구들이 새겨놓았다 한다. 조만간 그곳에도 한번 가봐야겠다.

제니 홀저는 시각 예술가이지만 언어를 활용한다. 그는 도시의 풍경 속에, 일상의 소품 속에 자신이 직접 적은 경구들을 새겨놓는다. 그의 경구 속에는 잔잔한 감동과 예리한 찔림이 있다. 묘비에 새겨놓은 문구처럼 여러 번 곱씹게 되는 문구이며, 인생의 교훈을 주는 문구이다. (실제로 제니 홀저는 묘비 위에 글을 새기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평소 잔소리도 싫어하고 자기 계발서의 조언들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제니 홀저의 글은 참 좋았다. 그의 경구는 도시의 풍경을 배경으로 물처럼 공기처럼 잔잔히 흐르곤 한다. 그가 40년간 해왔던 수많은 작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업도 물가에 설치되었던 작품이다. 플로렌스의 한 강변에 세워진 ‘YOU ARE MY OWN’ 글자 사인은 수면 위에 고요히 반사되며 흔들거렸다.

제니 홀저의 경구를 한 가지 꺼내든 김에 다른 문구들도 한번 살펴볼까. ‘PROTECT ME FROM WHAT I WANT (내가 갈구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라는 문구는 타임스퀘어의 한 전광판에서 송출되었다. 당시 타임 스퀘어는 젊은 예술가들의 놀이터였다.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했던 가난한 예술가들은 거리로 나가 벽화를 그리고 포스터를 붙였다. 제니 홀저도 처음 뉴욕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그와 같은 작업을 했었다. 그러다가 구겐하임 미술관으로부터 여러 권의 책을 읽고 각 책을 한 줄의 글로 요약해 보라는 의뢰를 받았었다 한다.

‘YOU ARE GUILELESS IN YOUR DREAMS (당신은 꿈속에서만큼은 솔직하다)’, ‘THE UNATTAINABLE IS INVARIABLY ATTRACTIVE (가질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LISTEN WHEN YOUR BODY TALKS (당신의 몸이 하는 말을 들어라)’.... 모두 미술관 호수 다리 난간에서 만날 수 있는 경구이다.

거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광장에서 불법 점거와 몸싸움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이 몰려다닌다. SNS 상에는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몰아세우고 헐뜯는 말이 돌아다닌다. 글자가 넘치는 세상에서 사람의 영혼에 가닿는 아름다운 언어는 뒤로 물러서있는 것만 같다. 보기에도 아름답거니와 잔잔하게 다가오는 제니 홀저의 문구는 새삼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광장의 이야기가 나와서 얘긴데, 제니 홀저의 설치작품 언저리에 ‘광장’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눈에 띄었다. 전시장 입구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단편 소설집이 놓여있다. 소설집에는 윤이형이라는 작가가 쓴 단편 소설도 실려 있었다. 배경은 미래 세계, 광화문 광장에서 데모를 하는 시민들의 편의를 위하여 정부는 광장을 개조해 복합 집회 문화 공간을 짓겠다고 발표한다. 지상 8층 지하 3층 규모의 집회 멀티플렉스 건물이다. 그 소식을 듣고 어떤 사람은 과거에도 정부가 멀쩡한 강을 이유 없이 퍼 올렸던 황당한 일을 했었다며 혀를 끌끌 찬다. 사람들은 정부가 집회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리기 위해 수작을 쓰고 있다며 반대 집회를 열었다.

풋,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공간에서라면 충돌은 줄어들 것 같다. 미래 세계에서 사람들은 크고 단단한 목소리를 내지만 자기와 다른 목소리에는 벽을 쳐버린다. 어쩌면 그들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 필요한 건 물처럼 공기처럼 흐르는 한 줄의 시구인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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