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12 - 장봉도(2)

2020.12.17 09:25:19 15면

장봉도(長峰島)가 묻고 장봉도가 답하는 장봉도의 가치

 역사를 흔히 거울에 비유하는데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과거는 미래를 여는 열쇠’라는 말이 있듯이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들추어 보며 미래를 조망하는 것이 역사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장봉도는 과거 장봉도의 역사적 사실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고, 그 본래의 모습 속에서 미래의 발전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봉도는 어떤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까? 지난 회에서 장봉도의 편리한 접근성과 힐링의 방법을 소개했으니 이번 회와 같이 보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체크 Point 1. 장봉1리 일명 옹암(甕岩, 독바위)의 말문고개와 마성(馬城)

 

장봉1리, 일명 옹암(독바위). 장봉선착장에서 하선해 장봉도를 관통하는 유일한 간선도로, 이 도로는 비스듬한 경사로인데 그 정점의 고개를 ‘말문고개’라 부른다. 즉 말의 목장 출입을 관리하던 문이 있었던 고개라는 뜻이며, 조선시대 당시 말을 기르던 장봉목장터의 출입구가 있던 곳이다.

 

안내문에 의하면 말목장은 “1454년쯤부터 1895년쯤까지 있었으며, 처음에는 소를 방목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말을 키웠다”고 한다. 이곳은 약 450년 간 조선이 운영하던 국영목장이 있었던 곳이며, 목장의 최고 감독자인 ‘감목관(監牧官)’은 종4품의 수군만호가 겸직했다.

 

말목장의 범위는 말문고개부터 옹암 선착장에 이르기까지 현재 장봉1리에 해당하는 전역이 해당된다. 그리고 말목장의 말을 관리하기 위해 담장으로 주변 산돌을 쌓아 마치 성처럼 돌렸으니 이를 ‘마성(馬城)’이라 부르며, 말문고개에서 국사봉 방향의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쌓았던 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옹암 해수욕장 부근의 평평한 지형이 목장의 중심지 였을 것이며, 조선시대 당시 강화도 소속의 장봉도의 포(항)구는 대빈창(장봉3리)이었기에 장봉도 말목장과 일반 거주지역과는 구별된 장소로서 구석진 곳에 위치했던 것이다.

▶ 체크 Point 2. 장봉2리 일명 평촌(坪村)의 구황시혜불망비

 

장봉2리, 장봉도에서 가장 평평하고 넓은 농경지가 펼쳐진 곳이라 붙여진 ‘평촌’. 뒤쪽으로는 장봉도의 주봉인 국사봉(國思峰)이 있고, 앞쪽으로는 편평한 경작지와 바다가 펼쳐져 있어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나라가 어려울 때 국난극복의 영웅이 출현하듯 20세기 초 장봉주민의 등불이었던 조용교(趙鏞敎)와 이정훈(李鼎薰). 그리고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높이 1m 남짓한 구황시혜불망비(救荒施惠不忘碑). 이 비석이 장봉출장소 경내에 있다. 1901년 대흉년 당시 못 먹고 굶주리던 장봉 주민에게 자신의 사재를 털어 배고픔을 덜어주고 배움의 길로 안내한 참봉출신 조용교와 진사 이정훈이 베푼 은혜를 잊지 말자고 1902년 마을주민이 세운 비석이다.

 

누군가에게 선뜻 선행을 베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며, 게다가 큰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다. 비록 1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두 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후손들에게 이어져야 할 것이다.

 

▶ 체크 Point 3 장봉3리 일명 진촌(鎭村)의 수군진(水軍鎭)

 

장봉3리, 일명 ‘진촌’이라 부른다. 사람에게 인명이 있고, 토지에는 지명이 있다. 지명은 지형의 형태나 과거의 역사적 흔적을 반영하는데, ‘진촌’이 역사적 흔적을 반영한 경우다. 즉, 이곳은 조선시대 지방군인 ‘영진군(營鎭軍)’ 중 ‘진(鎭)’이 있었던 곳이며, 강화도를 지키기 위한 조처였기에 ‘수군진(水軍鎭)’이 위치했던 곳이다.

 

바로 ‘수군진’이 있었던 곳에 자리한 마을이었기에 ‘진촌’이라 부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조선 숙종 4년(1678)에 병조판서 김석주와 부사직(副司直) 이원정이 강화도 방비를 위해 현지를 방문하고 ‘진’을 설치할 곳을 열거하면서 장봉도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강화도를 지킬 수 있는 해문(海門)이라는 점, 진촌이 군사항구로서 외부로부터 노출이 안된다는 점, ‘U’자형 해안으로서 수십 척의 군선을 정박시킬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장봉수군진 설치의 첫 언급이 있었다.

 

그 후 40년이 지난 숙종 43년(1717) 마침내 진이 설치되고, 최고 감독자로서 수군만호가 배치된다.(참고로 수군만호는 장봉1리에 있었던 장봉 국영목장의 최고 책임자인 감목관 역할을 겸하게 되는데, 진촌에서 대빈창으로 넘어가는 언덕너머에는 1700~1800년 사이에 세워진 감목관 선정비가 있었으며, 이곳을 비석거리라 불렀으나 비석의 매몰로 지명조차 사라져 안타깝다.) 이곳에는 수군 407명을 비롯해 모두 700여 명의 군사들이 주둔했고, 군함은 모두 5척이 배치됐다.

 

19세기 흥선대권군 집권 시절, 서양의 이양선 출몰이 잦아지면서 강화도의 해안 방비를 강화할 때 장봉진도 기존의 군인과 군함 등 무기 증강을 통해 준비를 강화했으나 1895년 갑오개혁에 의해 혁파됐다. 이런 군사시설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장봉3리 주민이었던 김신웅씨가 50년 전 밭을 갈다가 길이 1m 정도의 손잡이가 따로 있는 둥근 칼을 찾았다 하니 조선시대 사용된 무기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앞으로 예의 주시해야 할 장소다.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되고, 역사가 쌓이면 문화가 되듯이 장봉도의 진정한 문화는 무엇일까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석훈(문학박사·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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