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왕망과 김일제의 후손은 한 집안

2020.12.28 06:00:00 16면

다시 쓰는 가야사⑧

 

 

◇장남을 죽여버린 김일제

 

흉노 휴도(저)왕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의 자는 옹숙(翁叔)이었다. 그의 장남은 김농아(金弄兒)였는데, 무제는 농아를 총애해서 항상 곁에 두었다. 농아는 때로 무제의 목을 껴안을 정도로 허물없이 지냈는데, 하루는 이를 본 김일제가 눈으로 꾸짖자 농아가 무제에게 달려가 “옹숙이 화났다”고 울면서 일렀고, 무제는 “왜 내 아이에게 화를 내느냐?”고 김일제를 꾸짖을 정도로 허물이 없었다. 무제의 총애에 고무된 농아는 급기야 무제의 궁녀들을 희롱하기에 이르렀고 김일제는 그 음란함을 미워해 농아를 죽여 버렸다. 이를 안 무제가 크게 화를 내자 김일제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농아를 죽인 상황을 갖추어 말하자 무제는 크게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김일제의 어머니 알씨(閼氏)가 병으로 죽자 무제는 궁중 화가에게 초상화를 그려 감천궁(甘泉宮)에 걸어놓았는데, 그림의 제목이 〈휴도왕알씨(休屠王閼氏)〉였다. 알씨가 김일제와 동생 김윤(金倫)에게 법도를 잘 지키라고 가르쳤고 무제가 이를 훌륭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서》는 무제가 “김일제를 마음으로 존경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김일제 또한 무제를 잘 알았다. 무제의 총애는 재앙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무제의 총애를 받다가 자신은 물론 일족이 도륙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김일제의 다른 아들이 김상(金賞)과 김건(金建)이었는데, 형제는 아버지가 농아를 죽이는 것을 보았고, 또 한나라 궁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봤기 때문에 금도를 어기지 않았다. 상과 건은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昭帝)와 나이도 비슷했고, 함께 기거할 정도로 서로 친했다. 소제가 즉위하자 김상(金賞)은 봉거도위(奉車都衛)가 되고, 동생 건은 부마도위(附馬都衛)가 되었는데, 김일제가 사망하자 장남인 상이 투후를 계승했는데 그의 부인은 곽광(霍光) 장군의 딸이었다.

곽광은 김일제와 함께 무제가 죽으면서 어린 소제를 부탁한다는 유조를 받았는데, 곽광은 좌장군 상관걸(上官桀)과 권력투쟁에 나서 그를 축출했다. 곽광은 대사마(大司馬) 대장군이 되어 국정을 장악하고는 소제의 뒤를 이은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재위 27일만에 황제의 자리에서 쫓아냈다. 창읍왕 유하가 소제의 제사 때 무례를 범했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누가 봐도 신하의 권력으로는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곽광은 선제(宣帝) 즉위 후 자신의 딸을 황후로 들였는데, 곽광이 서기전 68년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선제는 2년 후 곽 황후를 폐위시키고 곽광의 장남인 곽우(霍禹)는 허리를 끊어 죽이는 요참(腰斬)을 내렸고, 곽씨 일족을 멸족시켰다. 그러나 김상은 그 전에 상서를 올려 곽씨 부인과 이혼하고, 곽씨 일족의 모반기미를 고변했다는 이유로 무사할 수 있었다. 김상이 아들이 없자 원제(元帝:기원전 49-기원전 33)는 일제의 차남 건의 손자 김당(金當)을 투후로 봉해 제후의 자리를 잇게 했다.

 

◇김일제 후손과 왕망 계보의 혼란

 

 

김일제의 후손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서기전 45~서기 23년)과의 관계 때문이다. 왕망은 서기 8년 유씨(劉氏)의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신(新) 제국을 세웠다. 왕망은 토지국유화 같은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지만 거대한 반발을 사서 서기 23년 녹림군(綠林軍)에게 피살됨으로써 신(新)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기 25년 한 고조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후한 광무제)가 한 제국을 재건하는데 왕망에게 망한 한나라를 전한(前漢)이라고 하고 유수가 재건한 신나라를 후한(後漢)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전한의 수도 서안(西安)이 서쪽이란 이유로 서한(西漢)이라고 부르고 후한의 수도가 동쪽인 낙양(雒陽)이라는 이유로 동한(東漢)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서》 〈김일제 열전〉은 “김당의 어머니 남은, 곧 왕망의 어머니 공현군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다[當母南 卽莽母功顯君同產弟也]”라고 말하고 있다. 김당은 왕망의 외사촌 형제인 것이다. 그런데 《한서》 〈원후(元后)열전〉은 “효원황후는 왕망의 고모이다[孝元皇后 王莽之姑也]”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서》 〈왕망 열전〉은 “왕망은 자(字)가 거군(巨君)인데, 효원황후의 동생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효원황후는 한나라 11대 원제(元帝:재위 서기전 49~서기전 33)의 황후이자 12대 성제(成帝:재위 서기전 32~서기전 7)의 어머니이다. 이를 정리하면 효원황후 왕정군(王政君)은 왕망의 고모이고, 김일제의 증손인 김당의 어머니는 왕망의 모친과 어머니가 같은 동모형제라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계보인데, 역사학자 문정창은 《가야사》에서 《한서》를 쓴 반고(班固)가 왕망과 효원황후가 흉노의 후예임을 감추기 위해 두 사람의 출자(出自)와 그 계보를 달리 꾸민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씨인 효원황후의 성을 왕씨로 바꿨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한서》 〈효원황후 열전〉과 〈왕망 열전〉은 대상을 서로 바꾸어 쓴 것처럼 서술했다. 〈효원황후 열전〉에서 왕망의 계보에 대해 쓰고, 〈왕망 열전〉에서 효원황후의 계보에 대해서 서로 바꾸어 쓴 것이다. 〈효원황후 열전〉에서 서술하는 왕망의 계보는 혼란스럽다. 왕망은 스스로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말했는데, 황제의 성은 요씨(姚氏)라는 것이다. 그 8대 후손이 순(舜)인데, 순은 규예(媯汭)에서 일어나서 성이 규(媯)씨가 되었다. 그 후 주(周) 무왕 때 이르러 순의 후손 규만(媯滿)이 진(陳)나라에 봉해졌는데 이가 진 호공(胡公)이라는 것이다. 그 13세가 완(完)이 제(齊)나라로 달아났는데, 제 환공(桓公)이 그를 경(卿)으로 삼아 성이 전(田)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11세 후손인 전화(田和)가 제나라를 갖게 되었는데 세상에서 왕(王)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그 후손 왕건(王建) 때 제나라가 진(秦)에게 멸망했는데 항우가 일어나서 왕건의 손자 왕안(王安)을 제북왕(濟北王)으로 봉했는데, 한나라가 일어나 왕안이 나라를 잃은 후에도 제나라 사람들이 ‘왕가(王家)’라고 불러서 왕망의 성씨가 왕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왕망의 성씨가 요(姚)→규(媯)→전(田)→왕(王)으로 네 번 바뀌었다는 설명인데, 왕실의 이런 복잡한 계보는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한 경우가 많다.

 

◇왕망과 한집안인 김일제의 후손

 

 

원제가 재위 16년만에 사망하고 아들 성제(成帝·BC 33∼7년)가 뒤를 잇자 효원황후는 황제 이상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황후는 자신의 친정 형제 다섯 명을 한꺼번에 장군 겸 후(侯)로 봉했는데, 이에 대해 《한서》는 “고조(高祖:태조 유방)는 공이 없는 신하는 후로 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지금 태후의 여러 동생들은 대개 공이 없었으나 후가 되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왕망은 효원황후의 동생의 아들이라는 것인데, 황후의 집안은 제후가 9명이고, 대사마가 5명인데도 〈왕망 열전〉은 왕망이 어릴 때 고아가 되어 가난했다고 쓰고 있다. 왕망의 부친 만(曼)은 일찍 죽어 후가 되지 못했는데, 왕망은 큰아버지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에 걸렸을 때 극진히 간호해 왕봉이 죽은 후 고모인 태후와 성제에 의해서 황문랑(黃門郞) 교위(校尉)에 올랐다. 왕망은 한번 자리에 오르자 곧 두각을 나타냈다. 왕망은 성제 때인 서기전 8년 대사마(大司馬)에 올랐다가 성제의 뒤를 이은 애제(哀帝)가 6년 만에 사망하고, 그 뒤를 9살에 불과한 평제(平帝)가 잇자 섭정 효원황후는 왕망에게 서정(庶政)을 맡겼다. 왕망은 평제 재위 3년(서기 3) 11살의 평제를 자신의 딸과 국혼시켰고, 2년 후에 성제가 죽자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嬰)을 황태자로 삼고 스스로 섭황제(攝黃帝)가 되었다. 나아가 서기 8년 신(新)제국을 세운 것이다. 문정창은 《가야사》에서 투후 김당의 모친 남(南)이 곧 왕망의 생모라고 보았다. 왕망과 투후 김당은 형제이자 김일제의 증손이라는 것이다. 왕망이 황제가 되자 신(新)의 조정은 김일제 후손들이 차지했다는 것이다. 왕망이 제국을 창업할 수 있었던 힘 중의 하나가 김씨들의 지지와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덕일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