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재미있는 仁川 8 - 응봉산 그리고 홍예문

2020.12.29 08:43:21 15면

 

 산(山)이라고 하면 늘 사람들은 높은 곳을 생각하며 올려다보는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있는 것 같다. 응봉산(鷹峰山)은 산이라는 생각에 앞서 공원 아니면 놀이터로 생각해 왔던 옛날의 옛날이 있다.

 

개항장 일대의 지계(地界)는 각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유린된 흔적이 많겠지만 그들의 영사관이 생기며 고관들의 저택이 속속 늘어나는 변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근・현대의 인천의 문화가 달라지는 현상을 부인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여 응봉산은 인천 역사의 한줄기를 형성한 것이다. 남쪽 기슭은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과 미군정 시대를 거치며 지금은 원인천이라 하여 기억에서 지워지는듯 하지만 최고의 요지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항구가 눈 앞에 펼쳐지며 해풍과 육풍을 받아 겨울과 여름을 지나기 좋은 곳, 살기좋은 터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곳을 말하자면 고종황제가 마음에 두고(구입) 있었던, 현 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데쉴러(하와이 이민 중재자)의 저택으로 원림(園林, 집안에 숲을 이룬 정원)이 있는 집, 일제 때에는 일본 요정(우로꼬)으로 사용되다 광복 후 탤런트 최불암의 부친이 소유하게 됐던 집처럼 응봉산의 네 방향에는 눈에 띄는 집들이 많았다. 유형문화재의 호(号)를 달고서 말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에 의하면 ‘사랑은 우리를 더 넓은 곳으로 불러 낸다’고 했다. 더 넓은 곳은 어디일까. 아무것도 타지 않고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모든 곳을 의미한다고 볼 때 응봉산에서 흐른 일대의 시가(市街)는 길로 연결되는 넓은 곳이 아닐까 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길, 오르막길은 상기증(上氣症)을 완화시키고 내리막길은 욕망과 욕구를 절제하게 만드는 걷는 자의 도(道)이다.

 

‘응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전국에 많다. 일정 거리를 두고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원거리에서 본 산의 모양새가 조형물을 닮았다거나 동·식물의 모습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천의 응봉산도 마찬가지로 매(鷹, 새 매 응)의 부리 모양으로 생겨서 순수 우리말로 매부리산이다. 그러나 정설로 보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산이 그리 높지 않으면 우리는 ‘뫼’라고 부른다.

 

‘뫼’가 매로 변화돼 뫼와 산이 겹치는 모순의 응봉산이지만 거두절미하고 또 다른 명칭으로는 각국 지계가 설정돼 있는 곳의 공원으로 ‘각국 공원’과 여러 나라의 공원이라 하여 ‘만국공원’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서양식 공원으로 최초를 자랑하는 곳, 바로 응봉산(현 자유공원)의 각국, 만국공원은 서울의 탑골공원(현 파고다 공원)보다도 9년이 앞선 서구식 공원인 것이다. 개항(1883년) 5년 뒤 러시아의 측량기사 ‘사바틴’이 설계, 면모를 갖춘 공원으로 인천의 대표적인 곳이다.

 

100년 전 인천 8경(景)의 하나로 이 ‘응봉산 저녁 눈’(鷹峰莫雪)이 있는가 하면 1973년의 인천 시사(史)에는 인천의 명승지 1호로 응봉산을 꼽았다. 지금의 자유공원은 1957년 10월 맥아더의 동상이 서면서 바뀐 이름이다.

 

일본은 러일·전쟁 뒤 우리에게 승리의 우월감과 공포를 조성하기 위한 포를 설치해 정오에 쏘아 올리는(1910년~1920년) 일도 있어 오정포산이라고도 불렀다.

 

응봉산(자유공원)은 정상에서 흘러내려 남쪽으로는 터진개로 이어지고 동쪽으로 율목공원과 이어져 있다. 그 줄기가 끊어진 곳이 용동 마루턱이고 남과 북을 관통하고 있는 곳이 지금의 ‘홍예문’이다.

 

자신들의 지계를 넓히며 화물 운송과 보행의 편의를 도모코자 일제는 전동과 만석동, 화평, 화수동을 통달하기 위해 1905년 응봉산의 허리를 잘라 홍예문을 만들게 된다. 일본의 공병대가 암석 폭파와 토목공사를 했고 중국인 석수장이와 조선인 노무자를 동원, 3년에 걸쳐 완성하게 된 것이다.

 

6~7m의 폭의 아치형(무지개 형상) 도로를 냈으나 차량통행은 그리 용이하지 않은 곳으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중국인과 노무자였던 우리의 선대들의 영령을 기리지도 못한 노역의 산물인 것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49호인 홍예문은 그 시절 지금의 동구로 우리를 내모는 통로로 이용했던 것이다. 112년이 지난 홍예문에 들어서 소리를 내면 되돌아 나오는 울림, 홍예문은 어쩜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영령들을 기억하는 듯./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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