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재미있는 仁川 9 - 동인천과 전환국(典阛局)

2021.01.12 09:41:02 15면

 동인천과 전환국(典圜局)

 

 ‘부끄럼 많은 보석상자 아가씨/ 어둠 속에 숨어서야/ 루비, 사파이어, 에머럴드..../ 그의 보석바구니를 살그머니 뒤집니다.’ <태양의 풍속 1939>

 

김기림 시인의 ‘길에서–제물포, 풍경. 인천항’ 시(詩)에서 보는 인천항은 엎질러놓은 보석처럼 빛이 찬란했는가 보다.

 

응봉산(자유공원)에서 바라보는 인천항의 밤은 정말 불빛의 반사에 의하여 보석처럼 눈에 든다. 이 코로나 시대 혼자 걷는 길은 평화이다. 더군다나 밤, 조명에 의한 시가(市街)는 변화무쌍한 이야기를 만들고 숨죽여가며 여명을 기다리고 있다.

 

응봉산을 등 뒤에 남겨두고 혈문(穴門)(홍예문 초기의 명칭)을 지나 걸어가는 내리막길 수탈의 시대에 핍박받던 선대들의 답답함이 되살아나는 듯 숨이 차다. 소한의 추위마저 온몸을 엄습하며 부추긴다.

 

송학동(松鶴洞)을 내려온 사거리 전동(錢洞)과 동인천동으로 갈라지는 기점의 네거리, 그곳은 초저녁인데도 옛날에 비하면 엄청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홍예문 남, 북쪽의 학교 학생들의 하교와 항구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은 물 흐르는 것처럼 대열을 이루는 인파들로 장관이었건만 개발지역으로 떠난 기업과 관공서 그리고 옮겨간 학교로 인한 원 인천의 공동화 현상이 되돌릴 수 없는 미래 인천 발전의 걸림돌인 것 같다.

 

전동길로 접어들기 전, 왜 ‘전(錢)동’일까? 돈이 되는 땅인가, 아니면 돈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일까. 그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고 근현대의 모습에 비친 그곳은 지계(地界)를 벗어나 손이 미치지 못해서인지 개발의 물결이 다른 곳에 비해 늦었던 곳이다.

 

동구로 연결되는, 일명 구름다리(雲橋)가 그 경계이다. 동인천역으로 가는 철길이 구획을 정리했다. 일명 전동 빌라촌이라고 불렸던 그곳은 인천에 유일했던 해군병원(천주교 아우쿠스의 집)이 있었고 인일여고 담을 끼고 한국은행 합숙소, 그리고 전동 변전소가 있어 지날 때마다 머리가 흔들리는 전자소음이 벅찼다.

 

다시 길을 돌려 화평철로 문 쪽으로 향하면 개교한지 113년의 인천여자고등학교가 있던 곳 (현재 동인천 행정지원센터)에 머물다 가야 하는, 역사의 흔적 앞에 눈을 주어야 한다.

전환국(典圜局)이 있었던 곳. 흥선대원군에 이어 집권한 민씨정권이 300만~400만짜리 청전(淸錢)이 유통상 폐해로 활용을 금지한 것이 시작의 발로라 보고 있지만 일본의 악화(惡貨) 남발과 일본 화폐의 유입시도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문호개방 이전에도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에 의한 고액전 발행이 주장되고 대원군정 때도 당백전(當百錢)과 같은 고액전이 유통했던 것으로 금(金)의 해외유출 방지, 그리고 국가재정 보호를 위한 방책이 아니었나 한다.

 

1883년(고종 20년) 민씨 정권은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건의로 전환국을 설치하게 됐다. 1892년(고종 29년)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기게 되었으니 바로 이곳이다. 동(銅)의 수입과 운반에 용이한 교통수단의 적지라 하여 설치한 곳으로 최초의 근대식 화폐제조인 것이다.

 

광무 4년(1900년) 용이한 교통수단으로 선정된 인천이 불편한 교통으로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니 8년 전의 편리한 말은 무엇인가 묻고 싶다면 우매한 짓일까. 당시 제조한 화폐(동전)는 5종류로, 5량, 1량 은화, 백동화, 황동화였다.

 

1926년 그 터에 학교를 세우며 한 줄기 인천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으며 전동(錢洞)의 내력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충족은 이루어진 것 아닐까.

 

기차역의 명칭을 두고 ‘동인천역’만큼 우여곡절을 겪은 역이 전국에 또 있을까. 그 이름이 붙은 지 올해로 환갑을 넘어 66년이다. 개통 당시는 축현(싸리재)역 이었지만 그 이름이 인천을 대표하지 못하고 부르기도 쉽지 않다는 여론에 밀려 1926년 인천역과 인천부청(시청)의 위쪽에 있다하여 ‘상인천역’이 됐다.

 

허나 광복 후 일본의 잔재청산에 앞서 1948년 축현역으로 되돌리는 곡절을 겪다 1955년 인천을 찾는 외지의 사람들 말에 의하면 역명이 어렵다 하여 ‘동인천역’으로 또 변경됐다. 실은 이 또한 인천의 동쪽도 아닌 곳의 역이 ‘동인천역’이라 하여 지금도 여론이 분분한 실정에 타고 내리는 기능뿐인 역으로 지금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

 

역이 있으면 광장이 있고 그 광장에 사람의 물결이 출렁이며 민주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었건만 흔들어도 깨어날 줄 모르고 있다. 동인천역은./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