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재미있는 仁川 11 - 입춘이 오면 생기는 몸살

2021.02.09 08:57:55 15면

 

 입춘(立春). 봄이 내 옷깃에 매달리는 날, 허나 매년 입춘 전후로 글쓴이는 그리움에 몸살이 난다. 오늘은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님, 그리운 님의 유향을 더듬어 볼까 한다.

 

홍예문을 지나 화평철로 문, 455번지에 문안을 했지만 홍예문을 되넘어 양지쪽 남쪽으로 걸어 염두에 둔 곳으로 가 보자. 숨이 차며 가는 길이 아니라 다리 풀려 내려가는 길, 욕망과 욕구를 절제하게 만든다.

 

46년 전인 1975년 입춘(2월4일)을 이틀 남긴 날, 소위 말하는 입춘 추위 탓으로 입동(立冬)보다 더 체감온도는 엄동에 가까웠다.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 선생이 돌아가신 날, 입춘을 이틀 앞둔 날이다.

 

송학(松鶴)동, 소나무 한 그루 없고 옛날에는 학이 많이 날아들었는지 모르지만 두 가지 전부 한 이름 그럴싸한 곳이다. 유년시절 나의 제일감(第一感)은 인천의 부(富)가 모여있는 동네로 있음과 없음의 대치현장 그 자체인 송학동에 거락(居樂)하셨다. 해 진 저녁 모과빛 조등을 켜 놓으시고 눈을 감으셨다.

 

1925년 중구 내동에서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인(부친 동관(東觀) 박헌용) 집안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할머니에게서 익히고 부친에게 안진경, 구양순체 등을 임서하며 훗날을 예견하기에 이른다.

 

39년 해성중학(현 인천남중)을 마치고 해방 전까지 줄곧 한학과 서예에 정진, 2년 후 젊은 듯한 22세의 약관에 대동서예협회의 회장이 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예총의 전신) 인천지대’를 검여 유희강, 석남 이경성과 함께 문화부흥 및 창조적 전통계승을 모토로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서여기인(書如基人, 서예는 사람과 같다)의 정신으로 매진한 동정은 ‘경기 예총회장’을 역임하며 항상 ‘지방예술이 곧 대한민국 예술의 밑거름’이라는 탁견을 실천에 옮긴 서예인이 아닌가 싶다.

 

1952년 ‘대동서화동연회’를 창립한 동정은 14세 연장인 검여 유희강과 동도의 길을 가며 우의를 돈독히 한 결과 53년 국전(서예부)에서 나란히 첫선을 보이며 일취월장해 추천, 초대작가,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한자 문화권의 사의화(寫意畵, 마음을 그린 그림)는 먹 하나로 서양을 앞지르는 ‘서예 외길’의 인고 뒤 밀려오는 감동을 낳는다. 학처럼 고고하면서 열정적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한 동정은 해(楷), 행(行), 초(草)서의 독자적 풍모를 개척했고 특히 행서에서 추사를 수용하는 절차탁마의 위용이 살아있으며 필세는 서성(書聖) 왕의지(王義之)를 버금하고 해서에서는 당대 서예가 중 어깨 견줄 만한 이 없음이 그를 대변한다.

 

두 차례의 경기예총 지부장, 다섯 차례의 부지부장을 역임하며 문화재 보호에도 전문가적 식견을 바탕으로 이규보 묘소 등 여러 유물과 유적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한 식견이 님의 유향 속에 남아있다.

 

필자와의 첫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보면 1969년이 아닌가 한다. ‘경기도 신인발굴예술제’가 열린 해 문학부문(詩部) 수석상을 수상(인천공보관)하던 날 ‘시(詩)속에 그림(畵)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소동파(소식)의 말을 빌린 축하의 말이 아직도 귓전에 딱지로 앉아있다.

 

님은 가셨다. 많은 것을 남기고 가셨다. 작년인가 싶다. 입추 지나 말복 쯤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한국 근·현대 서예 23인 명가전’에서 필자는 가신 님을 만났다. 작품으로 말이다.

 

무량청정(無量淸淨, 한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의 마음으로 쓴 작품 속에서 흘러내린 따뜻하고 맑은 정신, 그리고 힘이 먹 속에 숨어 꿈틀대는 모습. 6척 장신에 검은 안경테, 풍채 좋으신 님. 수석을 손에 올려놓으시고 돌에 구멍 날까 두렵게 쏘아 보시는 모습이 떠올라 울음을 참지 못한 필자는 결코 향을 사르지 못하고...

 

이제 날 잡아 대전으로 가야 할 것 같다. 동정의 또 한 제자 정태희 교수에게 전갈하고. 작품을 보는 것이 님보는 것. 그리움 달래기로 몸살을 털어보자./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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