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이제 우리가 외쳐야할 건, 진정한 ‘문화독립만세’

2021.02.18 15:19:10 16면

3·1 만세운동 102주년, 그날의 간절한 바람과 함성을 되새기며
총·칼도 막지 못한 3·1만세운동
민족주의 와해를 위한 문화정치의 교활함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 공원은 50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주위는 이미 일본 경찰들이 빈틈없이 포위하고 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팔각정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하늘을 찌를 듯한 만세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일본인 경기도지사도 군중의 기세에 밀려 모자를 벗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갓을 쓴 양반,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 기생들까지 누구랄 것 없이 함께 엉키어 만세운동을 벌였다.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숨막힐 듯한 감동의 만세운동이 있은 지 올해로 102주년이 된다. 그날의 간절한 바람과 함성을 되새기며, 이제 우리가 외쳐야 할 것은 진정한 ‘문화독립만세’가 아닐까 싶다.      

 

 

일본의 총·칼도 막지 못한 3·1만세운동

 

“조선독립만세!”, “일본인은 물러가라”, “조선은 조선사람의 것이다” 

 

1910년 평안북도 출생인 강병주의 회고(2011)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독립선언서가 정주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3월 어느 날, 사람들이 오산학교 뒷마당에서 집회를 갖기로 했어요.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하얀 새 옷을 입고 그 모임에 참가할 준비를 했지요. 우리는 모두 각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었어요. 태극기를 흔들었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연단으로 뛰어올라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에 대해 큰 소리로 연설을 했지요. 함성소리가 마당을 가득 메웠어요.”

 

그런 다음 학교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정주역까지 줄을 지어 행진을 했다고 한다. 목이 쉴 때까지 독립 구호를 외치면서. 그때 갈색 제복을 입은 수십 명의 일본 군인이 기차에서 뛰어내렸고,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탕, 탕, 탕! 사람들의 해산을 촉구하기 위해 공포탄을 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진짜 총을 남발하고 총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흰 옷’을 꺼내 입고 거리로 나섰다. 일반적으로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흰 옷’을 입고 생활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개화의 물결 속 20세기 조선의 복색은 상당히 다양해져 있었다. 때문에 만세운동 현장의 ‘흰색 물결’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의 폭력적 대응과 관련해선 체포된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도 남아 있다. 님 웨일즈(Nym Wales)가 1937년 당시 32살인 김산(훗날 본명이 장지락으로 밝혀짐)과 인터뷰를 하며 남긴 기록을 정리한 책, ‘아리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우리는 단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을 뿐, 일본에 대항해 싸운 것이 아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므로 조선의 법률로는 사형시킬 수가 없었다. 법에 의하면 살인죄에 대해서만 사형을 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놈들은 사람들을 체포하는 대신 거리에서 학살했던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폭력 행위는 끔찍했다. 군중의 첫 번째 줄이 말을 탄 병력에 의해 베어지고 짓밟히면 다음 줄이 만세를 외치며 달려들었고, 거리는 아비규환, 완전한 아수라장이 됐다. 이같은 일본의 잔혹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은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각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일정한 행동 양식이 관철된다. 이는 운동의 주동 세력이 각자의 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다른 곳에서 일어난 운동 소식을 듣고 이를 모방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특히 3일은 고종의 국장일로, 서울뿐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배관(拜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가득했다. ‘러시아 연방 외무성 대한정책 자료’(박종효)에 따르면 일제 당국은 이날 모인 사람을 약 50만 명이라 추산했다. ‘만세’ 외침은 이제 ‘아이고’라는 통곡으로 대체된 듯했다.

 

 

만세운동은 서울 외 몇몇 지역에서도 이미 이뤄지고 있었고 점차 확산돼 갔다. 각 지방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은 조건이나 상황, 주체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참가자의 동원과 운동의 진행과정은 상당히 비슷한 모습이었다.

 

3월 상순, 13도 전역으로 퍼진 만세 운동은 4월 말까지 두 달에 걸쳐 전국 220개 군 가운데 218개에서 일어났고, 200만 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횟수는 1500여 회에 달했다. 경기도 지역의 경우 3개월 간 384회였으며, 처벌자의 숫자에서도 압도적이었다. 전국의 지역별 탄압 수치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전체 총 776건 가운데 경기도는 256건으로 전체의 32%를 차지했다.

 

지금의 수원시, 오산시, 화성시 인근을 포함하는, 옛 수원군의 3·1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했다.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1995)에서는 수원군의 3·1운동에 대해 ‘3·1 독립전쟁’이라 불러도 좋을 만했다고 썼다. 실제로 상해 ‘독립신문’은 수원의 3·1운동 시위대를 ‘독립군’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총 28명이 무참히 살해되고, 민가 30여 채가 불에 탄 ‘제암리 학살 사건’은 이 지역 3·1운동의 치열함과 일제의 잔혹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민족주의 와해를 위한 문화정치의 교활함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문화정치로 전향하는데, 그 시기는 1920~1926년으로 본다. 그러나 일제가 내세운 ‘문화정치’란 3·1운동으로 격화된 민족감정을 달래는 동시에 독립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장기적인 지배체제의 안정화를 달성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총독부는 조선의 유력자 집단을 지배체제 내로 포섭하기 위해 전국 각 면(面)에 협의회를 설치, 조선인들의 정치 참여를 허용했다. 이 시기 면 협의회 의원을 역임한 사람들은 대부분 유력한 동족 마을의 인물들이거나 상당한 토지재산의 소유자, 학력이 뛰어난 사람 등이었다.

 


일제의 교육탄압정책도 다소 풀이 꺾였다. 1922년 2월 개정된 조선교육령을 발표, 기존 11년 내지 12년이던 전체 교육 연한을 최고 17년까지 연장시켰다. 이전까지 조선인이 다니는 초등교육 기관은 기본이 3~4년제였다. 농촌 지역에는 문맹을 겨우 면할 정도의 1~2년제 간이학교도 많았다. 반면 일본인은 6년제 학교에 다녔다.

 

6년제를 졸업해야 중학교 진학 자격이 주어졌던 점을 감안하면 그 이유가 충분히 짐작된다. 이에 일각에서 자발적으로 의연금을 모으고 경기도에 학년 연장을 공식 요청하기도 했지만, 당시 일본인 경기도지사는 조선인은 2년제 교육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종속을 조장하고 한국인을 하등 국민으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조선에서 교육기관이 점차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교육 내용은 식민지 지배 목적을 실행화하는데 제한돼 있었다. 그러니 교육받은 인구의 증가는 곧, 지배정책에 동화돼 가는 인구가
그만큼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황민화 교육 정점은 일본어를 필수 과목으로 강조하는 반면 조선어를 배제함으로써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조직적이면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것은 관립신사(官立神社)와 신사참배 강요였다. 학교는 물론 종교단체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할 정도였다. 이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해 조선인을 모두 ‘충량한 제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조선총독부 지배정책의 일환이었다. 

특히 일제는 문화정치를 내세워 문화의 비민족화(非民族化), 비정치화(非政治化)의 주창은 물론 정치와 예술을 가능한 멀리 떼어 놓는 방법을 강구하기도 했다.

 

 

한편, 3·1 운동을 전후해 국내에서는 새로운 문학 활동이 등장, ‘창조(創造)’, ‘폐허(廢墟)’, ‘백조(白潮)’ 등의 동인지가 발간됐다. 하지만 대체로 민족적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자연주의, 낭만주의적 문학을 지향했다. 민족이 처한 현실에 관심을 가졌다 해도 그것은 저항주의적 측면이 아닌 낭만과 상징, 퇴폐와 탐미적인 방향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1920년대에는 조선 어린이의 심성에 맞는 새로운 노래를 창작·보급해 정서를 함양시켜주는 동시에 애국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창작동요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본격적인 동요운동은 방정환(1899~1931)을 중심으로 한 ‘색동회’에 의해 이뤄졌는데, 색동회의 주요 인물인 윤극영(1903~1988)의 ‘반달’을 통해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민족적 비운을 전국적으로 알렸다. 

 

미술사에 있어 일제는 자국의 미술가들을 심사의 명목으로 동원시켜 지도, 권장하면서 식민지의 현실이나 사회적 주제를 가진 어떤 작품도 용납하지 않았다. 반식민지적인 예술의 예방을 위해 그런 주제를 지닌 작품을 ‘프로파간다(propaganda)’라고 해 예술이 아니라고 간주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검열은 우리나라 근대극의 발전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결론적으로 일제의 ‘문화정치’는 3·1 운동으로 인해 고양된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누그러뜨리고, 조선인을 식민 지배체제 속으로 더욱 깊이 포섭하기 위한 교활한 방책에 불과했던 셈이다. 종래의 노골적인 무력지배를 완화하는 척하면서 한민족의 단결심을 분열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참조=김지훈, ‘3.1운동의 성격과 의의 재고찰’(2013), (사)기전역사문화서포터즈,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경기도’(2020)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강경묵 기자 kamsa59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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