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균의 재미있는 仁川 13 - 신포동에 두고 간 그리운 금강산

2021.03.09 08:24:26 15면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뺀다”라는 말이 인천에서 흔하게 들리는 말이다. 아마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인천인 인양 행세하며 척 하는데서 나온 말, 정말 고개 돌려보면 그런 일 많다.

 

좀 외람된 이야긴 줄 모르겠으나 애향심, 아마 까맣게 잊은 단어가 아닌가 싶다.

 

인천인으로 인천을 사랑한 사람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아주 옛날(1653년, 효종 4년)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뿐, 그 누구도 없을 것 같다. 57세에 지은 <진택명>이란 글 속에 ‘7개월 간 서울에 있다 인천으로 가니 / 고향으로 돌아온 것 내 소원을 다한 셈요’라고 썼으니 애향심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것도 7개월 간의 외지생활에서 돌아온 고향, 소원을 다 이루었다니 말이다. 물론 선산과 종회가 인천에 있기 때문이라도 하지만 인천 출신이라는 자부심의 발로, 우리도 배워야 하며 긍지를 가져야 될 것이다.

 

효성 또한 지극해 조기로 담근 젓을 먹지 않았다는 이야긴 즉 그의 어머니가 조기젓을 끔찍이 좋아하셔서 그 젓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나 먹을 수 없었다는 효성의 극치.

 

조기젓, 고여(古如) 우문국(禹文國, 화가, 문총구국대 창설인) 선생이 끔찍이 좋아했던 찬 중에 찬이다.

 

홍예문 길에서 중앙동 4가 길 <인천 한세기>를 펴내시고 의학박사이셨던 신태범 박사의 신외과병원을 끼고 돌아선 허름한 백반 집, 고여 선생의 단골집으로 간판은 ‘인천집’. 이 집의 조기젓이 그를 붙들어 매 놨었다. 칼칼하고 짭조름한 간을 좋아했던 식성 또한 강골의 문조 선생을 잘 대변했다.

 

식사시간 한 시간에 말고리 풀어놓은 시간은 두 시간, 오늘에 이르러 생각해보니 그것이 다 역사의 줄거리였다.

 

이왕지사 나왔으니 보따리 풀지 않을 수 없는 신외과병원 이야기 좀 해보자. 어느 병원이든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환자들이 기다리는 대기실이 있게 마련이지만 신외과병원은 환자들보다 중앙에 둥그런 우물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별스런 기억이 지금껏 생생하게 살아온다.

 

투박한 송판으로 만들어진 원형의 뚜껑을 쓰고 있는 그 우물은 수돗물이 단수되는 3~4일, 길게는 일주일 동안 동네의 공동우물로 멀게는 해안동에서도 물을 길러오는 보물이었다. 1920년대 히라노(平野) 상점 건물로 있던 것을 1942년에 신태범 박사가 매입해 병원을 개업, 수많은 환자를 돌보셨던 ‘신외과병원’. 70년 이후 흔적을 찾기는 하늘에 별 따기.

 

여로, 앞만 보고 걷던 길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는 길 어떤 연유로 되를 돌아보냐면, 살아있는 내가 오는 길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하고 서성댈까봐 뒤돌아본다는 노 사백들의 말처럼 서너 명이 함께 걷는 길은 두세 명씩 떨어져 걷게 마련,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편안한 얼굴이 아니었고 안경 쓴 눈에서는 축축한 비가 감도는 것 같았다. 먼 이국으로 이민 가시기 전 송별회장의 한상억 선생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석별의 정을 뚝뚝 흘리셨다.

 

중앙동 4가의 ‘진흥각’ 2층은 많은 문화예술계의 사람들로 붐볐다. 외아들(한충의)이 금성사 미주지사에 근무 차 아주 눌러앉은 연유로 이민 길에 오르신 이록(二錄, 한상억의 아호) 선생은 지병인 심장병 치료가 두 번째 연유지만 토박이 인천(강화도 양도면 출생)인이 떠난다함이 얼마나 아쉬웠을까.

 

작곡가 최영섭씨와 동향이며 <그리운 금강산>을 작사하며 곡을 붙여 부르니 곧 국민가곡으로 한때 금지된 적도 있었으나 분단의 아픔을 딛고 마음으로나마 영산(靈山)을 찾고자 하는 통일의 염원을 시로써 푼 평가를 얻지 않았나 싶다.

 

1987년에 떠나 5년 뒤 방문길, 인천을 다녀간(1992년 10월) 그 다음 달 걸어가신 길이 저승, 참으로 슬프다.

 

‘진흥각’, 중화요리 집으로 많은 식객(食客)들이 찾는 곳으로 본래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그 옆 ‘제일은행’ 자리가 진흥각의 자리였으나 제일은행이 길 모퉁이에 앉고 싶어 거래상 맞바꾸게 된 것이다.

 

오랜 세월을 버티며 남아있는 중앙통의 일본집들, 그 중에서도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후루다 양품점’을 째즈카페 ‘버텀라인’으로 간판을 바꾸고 그 맞은편 ‘조선식산은행’ 건물로 썼던 (지금의 중화루) 그 터는 헌병대가 버티며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 권투구락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 옛날이구나. 신포동의 풍광도./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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