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을 가다 35 - 백령도 거타지(居陀知) 설화와 연지동 연못

2021.07.01 08:57:22 15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 중의 하나인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백령도와 관련된 설화가 수록돼 있다. 지금부터 1100년 전에 해당하는 통일신라 진성여왕(재위 887~897) 때의 거타지(居陀知) 설화인데, 그 내용과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 체크 포인트, 거타지 설화의 내용

삼국유사 진성여왕 거타지조에 의하면 여왕의 막내아들인 아찬(阿飡, 6관등) 양패(良貝)가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이 때 거타지도 궁사(弓師)로 뽑혀 따라가게 됐다. 가는 도중 곡도(鵠島, 현 백령도)에서 풍랑을 만나게 됐다.

 

양패가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니 “섬 안에 신령한 못(神池)이 있어 여기에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 하므로 일행이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니 연못의 물이 높이 솟아올랐다.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에 남겨 두고 떠나면 순풍을 얻으리라” 했다.

 

양패가 섬에 남을 자를 가리기 위해 각자의 이름을 적은 목간(木簡: 글을 적은 나뭇조각) 50개를 만들어 물에 넣고 제비를 뽑으니 거타지라 쓴 목간이 물에 잠기었으므로 거타지만을 남기고 모두 떠났다.

 

거타지가 홀로 섬에 남아 수심에 쌓여 있자 홀연히 한 노인이 연못 가운데서 나오며 말하기를 “나는 서해의 신[西海若]인데 매일 해 뜰 때마다 하늘에서 한 중이 내려와 다라니[眞言]를 외며 연못을 세 바퀴 돌면 나와 가족들이 모두 물 위에 둥둥 뜨게 되고, 그 때마다 그 중이 자손들의 간을 하나씩 빼 먹어 지금은 내 아내와 딸만 남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도 다시 그 중이 나타날 것이니 그 때에는 그를 활로 쏘아 달라”고 부탁했다. 거타지가 쾌히 승낙하니 노인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거타지가 숨어서 그 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니, 과연 한 중이 내려와 주문을 외고 늙은 용의 간을 먹으려 했다.

 

그 순간 거타지가 활을 쏘아 중을 맞히니, 중은 곧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노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거타지에게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아 달라고 하며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주고, 두 마리 용에게 명해 거타지를 받들고 사신 일행이 타고 가는 배를 뒤쫓아가 그 배를 호위해 무사히 당나라에 도착하게 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를 두 마리의 용이 받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임금에게 이를 아뢰니, 임금이 신라의 사신은 비상한 사람일 것이라고 여겨 성대히 대접하고 후한 상까지 내렸다. 고국에 돌아온 거타지는 꽃가지로 변한 노인의 딸을 다시 여자로 변하게 해 그녀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다.

 

▶ 체크 포인트, 역사적 의미

 

이 내용이 암시하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당시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대립했던 시기로서 대동강 유역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통일신라가 육로로 압록강을 넘는다거나 백령도~장산곶을 거쳐 서해 연안 항로를 따라 북상해 요동반도 그리고 발해만을 거쳐 통행하는 외교활동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남북한이 대치해 남한이 육로나 황해도 평안도 해안을 따라 중국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막혀 있는 현실과 같은 경우다.

 

첫째, 양패 일행이 풍랑을 만났던 ‘곡도’

 

‘곡도’ 일명 골대도(骨大島)는 삼국시대 즉 고구려 때부터 백령도를 부르던 최초의 명칭이다. 또 백령도 일대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4대 험로 가운데 하나인 인당수(印塘水)와 접해있어 예로부터 위험한 뱃길로 유명하다.

사람을 제물로 바친 인신공희(人身供犧)로 잘 알려진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바다의 풍파를 잠재우기 위한 제물로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몸을 바친 곳이 인당수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백령도 주변의 해상 조건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따라서 ‘곡도’라는 명칭과 인당수와 같은 험난한 해상 상황을 감안하면 백령도임이 분명한 것이다.

 

둘째, 섬 안에 신령한 연못

 

백령도에서 당나라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던 연못은 어디에 있었을까? 400년 전, 1620년 백령도로 귀양와 두무진을 보고 ‘늙은 시인의 마지막 작품’이라 촌평했던 이대기는 그의 책 ‘백령도지’에서 “백령도 서쪽 수십 리에 (연)못이 있는데 크기가 호수 같고 둘레가 5∼6里(약 2.5㎞)이고 수목이 울창해 파란(波嶽)이 심흑(心黑)하고 거위, 고니, 오리 등 여러 종류의 백조들이 알을 낳고 새끼를 치는 별천지다. 사랑선자(四郞仙子)의 전설이 헛소리가 아니면 반드시 이 지경일 것이다”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백령도 서쪽의 연못은 연지동의 연못을 말한다.

 

현재 연지동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연꽃이 피었던 연못인 ‘연지(蓮池)’가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는 매립해 논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원래 ‘위 연못’, ‘아래 연못’ 두 개의 있었고 그 중 신지(神池)라 추정하는 연못은 ‘위 연못’에 해당한다.

 

아래 연못은 위 연못에 비해 낮은 지형으로 갯고랑(tidal channel)으로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조수의 영향으로 논바닥 밑에는 갯벌이 있고 그리고 토탄이 발달해 땔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위 연못은 연지동 마을에 접해있는 논으로 원래 지형은 지금보다 높았으며 경지 정리과정에서 흙을 파 아래 연못 지역의 갯벌을 메우는데 사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았던 지역으로 ‘神池’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사라진 연지, 그러나 과거 연못의 흔적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설화의 내용은 매우 현지 사정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셋째,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황해 횡단한 역사적 사례

 

일본의 구법승 엔닌(圓仁)이 귀국할 때 이용하기도 했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따르면 그는 당으로 갈 때는 제주도 남쪽의 동중국해를 통과했으나 847년 귀국할 때는 산동반도의 적산포(赤山浦)를 출발, 황해를 횡단해 2일 만에 한반도 서해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백령도는 통일신라부터 해상교역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황해를 무대로 한반도가 동아시아로 성장하는데 있어 향후 역할이 주목된다. 통일이 이뤄진다면 북방외교의 전진 기지 그리고 분단의 현장에서 평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은 더욱 부각될 것이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이인수 기자 yis622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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