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고성(孤聲)]홍범도 장군을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2021.08.24 06:00:00 13면

 

 

홍범도 장군이 서거 78년 만에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고의 예우로 그를 맞이하였다. 그동안 멀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 묻혀 계시던 전설적 인물인 홍 장군이 해방된 지 76년이 지나서야 고국 땅을 밟게 되신 것이다. 아직 시신이 발굴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와 달리 그의 후반부 삶과 죽음을 알고 있기에 이제라도 모셔온 것에 만시지탄이지만 부끄러움을 면한 심정이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 출신으로 군 나팔수 생활, 승려 생활과 포수시절의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회자되어 왔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한 것은 1895년의 단발령을 계기로 함경도 안변의 학포라는 곳에서 14인의 동료와 함께 하면서였다. 주로 강원도와 함경도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살던 포수들을 규합해 의병을 조직한 홍범도 부대는 400명에서 많게는 1400명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일대의 최대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자 가장 먼저 전국적인 항일조직을 결성한 곳은 연해주에 망명 중인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13도의군이었다. 이 조직에 홍범도 장군이 참모부 의원으로 선출된 것은 이전의 활동에 대한 양반가 출신 지도부의 인정이었을 것이다.

 

1910년대 홍 장군은 연해주와 북만주 일대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지휘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워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전투가 없는 기간에는 부대원들과 함께 막노동하여 군자금을 확보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에겔셀드 선착장은 지금도 러시아의 많은 배가 왕래하는데 이곳에서도 홍 장군은 하역작업을 하였다.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은 이렇게 솔선수범하던 장군의 리더십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독립운동의 상징인 홍범도 장군에 대해 공산주의자라는 등의 수준 이하의 비난에는 대꾸할 가치도 못 느끼지만 1921년의 자유시 참변에 참여해 같은 독립군을 죽였다는 배신자라는 말은 모욕적이다. 그가 자유시 참변이 벌어질 때는 그 현장인 슬라세프카 역 근처에 있지도 않았고 참변 소식을 듣고는 측근들과 함께 솔밭에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참변 이후 군사재판의 재판위원으로 참석한 것 역시 흩어진 독립단체를 다시금 규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그에 대한 비난과 왜곡은 영웅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오히려 홍범도 장군의 일생은 독립단체들의 연합과 통합이었다. 그는 처음 의병활동을 할 때부터 이합집산하고 있는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그의 참모장 출신인 김소림은 “홍 장군은 자기에게 탄환이 있으면 다른 군대에 서슴지 않고 나눠주고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하기를 좋아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홍 장군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 친일파 장군들의 무덤 아래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국립묘지법 개정안이 국회 계류 중이라고 하나 하세월이다. 기왕이면 고향인 평양으로 민족 화합 차원에서 모셔졌으며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후손들이 진정한 민족통합을 이룬다면 홍 장군이 지하에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임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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