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정신의 줏대

2022.05.10 06:00:00 13면

 

 

얼굴은 ‘얼의 꼴’이다. 법정 스님이 한 말이다. 얼은 넋이고 꼴은 겉모양이니, 얼굴은 넋의 겉모습인 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신의 줏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고들 한다. 법정 스님의 말대로라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넋에 따라 삶의 궤적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현재의 삶이 곧바로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얼굴에는 삶은 없고 정신의 줏대만 있다. 졸업논문과 연봉계약서와 등기부등본은 없고 뼈와 살과 주름만 있다. 뼈와 살과 주름을 따라서, 부딪고 보듬고 벼르는 생각의 흔적만 있다.

 

얼굴에는 거짓이 없다. 화장이나 성형으로도 감춰지지 않는다. 뼈를 깎고 주름을 덮어도 정신의 줏대는 바뀌지 않는다. 얼굴은 저마다 지닌 정신세계의 조감도(鳥瞰圖) 같아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빛에서 묻어난다. 인물 사진을 즐겨 보는 까닭도 그래서다. 그렇다고 내게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앎이 얕아서 깊게 보지 못하는 나의 눈은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대신 내 눈이 쫓는 건 사진에 담긴 얼굴의 흔적이다. 눈빛과 표정과 주름에 드리워진 생각의 발자취이다.

 

얼굴에는 사연이 있다. 얼굴을 담은 사진도 마찬가지다. 사연은 흑백 사진일수록 더 확연하게 도드라진다. 색을 배제한 얼굴은 엑스레이 필름의 그것과 같아서, 사연의 본질을 흑과 백으로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흑백사진은 찰나로 응축된 이야기책이다. 순간에 담긴 이야기들은 이강산의 사진집에도 가득하다. 나를 이강산의 작품으로 이끈 사람은 시를 짓는 장우원 형이다. 작년 가을이었을까. 류가헌에서 열리는 사진전에서 이강산의 흑백사진들과 만났다. 지워지고 잊히는 사람들이 ‘여인숙’이라는 간판을 달고 사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숨이 덜컥 막혀서 사진 속 얼굴들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나는 그날, 이강산의 흑백사진을 통해 명품으로 도배한 우리사회의 민낯을 보았다. 고층빌딩에 가려진 반지하 단칸방의 수챗구멍을 보았다. ‘오징어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딱지를 내려치는 기훈과 덕수와 새벽과 미녀를 보았다.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소리치는 영화 ‘기생충’의 기택과 가족들을 보았다. 밤거리에 주저앉으면서도 파이팅을 외치는 우리시대 ‘나의 아저씨’들을 보았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유서를 남기고 죽은 송파구 석촌동 세 모녀를 보았다.

 

그리고 오늘, 이강산의 눈을 빌어 흑백의 세상을 다시 본다. 지하철 시위현장에서 장애인에게 삿대질하는 자의 눈을 본다. 태극기와 성조기와 십자가를 들고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무리의 눈을 본다. 이대남과 이대녀로 가르고, 그것을 애국이라 떠드는 정치집단의 눈을 본다. 빨갛게 핏발 선 눈의 흰자위를 본다. 하얗게 질려버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본다. 침울하지만 이것이 우리사회의 얼굴이다. 개별의 얼굴에 드리워진 보편이고 실체다. 감춘다고 감춰지지 않는 얼의 꼴이다. 정신의 줏대다.

 

이강산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이면서 시인이고 소설가이다. 작년 가을에는 세 번째 소설집 ‘아버지의 초상’을 출간하였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

고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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