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10월의 숲

2022.10.20 06:00:00 13면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유랑 가요의 고전은 태평레코드사에서 1940년 10월 발매한 음반으로서 ‘산 팔자 물 팔자’와 뒤를 이은 ‘번지 없는 주막’이란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40년의 대표곡이요 히트곡으로써 백년설이 불렀다. 이 가요는 해방이 되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까지 불러졌다. 내 기억의 저장고에 기록된 내용의 가사를 보자면, ‘산이라면 넘어주마 물이라면 건너 주마 / 인생의 가는 길이 산길이냐 물길이냐 / 그님도 짝사랑도 풀지 못할 내 운명 / 인심이나 쓰다가자 사는 대로 살아보자’ 이다. 나는 인천에 사는 매형의 회갑 때 이 노래를 불렀다. 많은 사람이 산길인가 물길인가 하면서 지치고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도 그랬다. 산길인지 물길인지, 번지 없는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다시 걸어야 했다. 그때 장만(張晩)의 시조를 만났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워라 /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갈이만 하리라.’

 

바다의 풍랑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험한 산길에서 다시 고생을 한 어느 한국인의 한숨 소리를 듣는 듯했다. 이어서 배·말 다 집어치우고 흙 속에서 호미로 농사짓는 내일을 서약해보는 조그마한 희망의 눈초리를 발견했다. 50자도 안 된 그 시조의 노래 속에는 천년 동안 불려온 민중의 마음과 내 아버지의 마음이 오롯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탕자가 세상에 버림받고 아버지(고향)의 품으로 찾아가는 조상들의 마음과 평화에 대한 동경을 엿볼 수 있었다.

 

신문에서 고향 원로 화가들 작품을 전시한다고 하여 후배 문인과 도립미술관을 들러 살펴보았다. 네댓 작품이 눈에 띄었다. 작가를 만난 듯 반가웠다. 작가는 늙었어도 작품은 제작 당시의 그대로였다. 미술관에서 봉사하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웃고 있으니 ‘실례지만 선생님은 몇 학년 몇 반이냐?’고 묻는다. 7학년 1반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못 알아들었는지 다시 7학년 몇 반이요? 한다. 곧바로 나는 ‘우리 반까지 찾아오시게요.’ 했더니 모두가 웃는다.

 

10월의 아침, 건지산을 걸었다. 30여 분 걷다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는 쉼터 의자에 앉았다. 옆에서 팔운동을 하던 두 사람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지금 연세가 여든셋이라고 하셨죠. 저는 여든이니 제가 형님이라고 해야겠네요.” 하니, 나이가 많은 분이 아저씨라고 하라는데, 이 사람은 다시 형님이라고 해야 맞지요. 한다. 10월의 숲 속에서 동양의 장유유서(長幼有序)질서를 목도하게 되었다.

 

갑자기 산새들이 시끌벅적하다. 새들은 회갑연을 몇 년째 치르는지 모르나 어느 새의 회갑잔치라도 열리는 아침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과 강은 정복하거나 건너야 할 장애물 같다. 하지만 숲은 조용한 나무세상의 품 같다. 숲 속 아침의 공기에서는 갓난아기의 태내웃음을 떠올리게 한다. 지친 삶의 숨길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그래 오늘 하루도 잘 보내야겠지!’ 하는 긍정의 에너지를 자극하게 된다. 10월의 숲속에 있으면 누구나 철학을 하게 된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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