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 발전에 ‘백남준’이 끼친 영향은?

2022.11.21 10:39:49 16면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시 ‘백남준 효과’
백남준의 예술적 성취와 후대 작가들에 끼친 영향 조명
백남준 90년대 말~90년대 초 대표점 43점 출품
구본창·양주혜·이불·전수천 작가 등 90년대 초 실험작 60점 선봬

 

13대의 크고 작은 모니터로 이뤄진 비디오 로봇, 그 앞에는 測(측), 雨(우), 器(기)라고 새겨진 비디오 조각들이 놓여 있다. 백남준이 1990년 제작한 이 작품의 제목은 측우기를 발명한 과학자의 이름인 ‘장영실’이다.

 

백남준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1992) 전시를 전후로, 아직 비디오 조각에 익숙하지 않던 1990년대 한국 관람객들을 위해 친숙한 역사 속 인물들을 로봇으로 재탄생시켰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르며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잘 알 수 있는 익숙한 이름들을 붙여 작품을 소개하고자 했다.

 

지난 10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전시 ‘백남준 효과’는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이 1984년, 35년 만에 귀국한 후 199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을 조명한다.

 

전략가, 기획자, 문화번역자로서 백남준의 역할을 살피며, 한국 현대미술 발전과 후대 작가들에 끼친 영향을 비춰 그의 예술적 성과를 들여다본다.

 

 

또한, 백남준이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기획했던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1992),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1993) 전시의 주요 주제들을 통해 1990년대 한국 미술의 상황을 새롭게 살핀다.

 

당시 한국 미술계는 세계화와 정보사회 도래라는 급격한 정세변화 속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새로이 발굴하고, 과학과 접목한 ‘예술매체의 확장’을 고민했다.

 

전시는 이러한 고민이 담긴 1990년대 한국 시각 문화의 정체성을 백남준과 당시 활동한 한국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는 총 103점의 작품이 출품됐다. 백남준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주요 작품 43점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장르와 매체의 확장성을 활발히 탐구하던 구본창, 김해민, 문주, 박이소, 석영기, 양주혜, 윤동천, 이동기, 이불, 전수천, 홍성도, 홍승혜 등 한국 동시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 25명의 90년대 회화·설치·사진 대표작 60점을 함께 볼 수 있다.

 

전시는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 국제적인 행사들과 세계화의 꿈 ▲근대화의 길, 과학과 기술의 발전, 미래를 향한 낙관 ▲혼합매체와 설치, 혼성성, 제3의 공간과 대안적인 공간 ▲개인의 탐색, 소수(정체성), 다원성 등 총 4부로 나뉜다.

 

각 서두에는 백남준이 꿈꿨던 이상과 목표가 드러난 실제 인터뷰 및 칼럼 일부를 제시해 주제를 환기한다.

 

 

◇ ‘세계 속의 한국’을 꿈꾸며 정체성을 고민하다

 

1부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한 정체성의 문제들을 다룬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수상작이자 한국 세계화의 꿈을 담은 백남준의 ‘칭기즈 칸의 복권’을 비롯해 ‘장영실’, ‘김유신’ 등이 출품된다.

 

또한, 전통 수공예와 현대 산업의 혼합매체로 변해가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표현한 구본창 ‘아! 대한민국’ 연작 등의 작품을 통해 세계화 속 대두된 문화적 현안과 당시 미술계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

 

2부는 1990년대 말 본격적인 정보사회가 도래하기 직전 한국 미술계가 실험하였던 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가장 먼저 백남준이 200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만든 ‘색동Ⅰ’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보라 백남준은 꼭 재기한다’고 쓰인 자필에는 힘이 느껴진다. 다시 일어나겠다는 그의 낙천적 성향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동시대에 떠오르는 사회적 주제를 바라보는 백남준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나의 파우스트’ 연작도 볼 수 있다. 총 13개의 연작 중 ‘민족주의’, ‘인구’, ‘통신’, ‘예술’, ‘농업’, ‘교통’ 등 6개 작품이 전시된다.

 

 

또한, 양주혜 ‘그래도, 남아있는 것들...’, 홍성도 ‘시간 여행’, 전수천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그 한국인의 정신’ 등 새로운 기술이 만들 신세계에 대한 상상과 실험이 반영된 당대 한국미술 작품들을 선보인다.

 

전시를 기획한 이수연 학예사는 “양주혜의 작품은 당시 최신 기술을 이용해 작업한 ‘라이트 박스’로 납골함을 상징한다. 새로운 기술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삶, 죽음과 연관돼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 기존에 없던 제3의 시공간

 

3부는 혼합매체와 설치, 혼성성, 제3의 공간과 대안적인 공간을 다룬다.

 

달을 TV로, TV를 달로 은유하며 새로운 매체와 가장 오래된 매체를 넘나드는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1965-67’을 만날 수 있다.

 

이수연 학예사는 “백남준은 비디오와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 이에 해당하는 매체를 ‘달’이라고 생각했다”며 “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 나에 대해 생각하고, 가족과 함께 모여 바라보았던 존재였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또한, 홍승혜 ‘종이 풍경’, 이상현 ‘잊혀진 전사의 여행’ 등 현대 기계 문명을 이용한 매체 실험을 넘어, 고급과 대중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 개인의 욕망과 자기표현에 대한 고민

 

4부는 백남준 ‘TV 알’, 이불 ‘갈망’, 문주 ‘이름 없는 원’, 이수경 ‘다중의 나’ 등 당대 문화의 주요 현안이었던 개인 욕망 발현과 자기표현의 시도를 투영한 작품들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당시 한국 시각 문화의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전시의 마지막에는 실험적·선구적인 작가 백남준으로서의 출발점, 정체성이 담긴 ‘비밀이 해제된 가족사진’을 만나볼 수 있다.

 

백남준은 사진에 등장하는 10명의 여성들에 ‘나의 어머니(母)’, ‘누이 희덕(나의 첫 피아노 선생님)’, ‘큰어머니’, ‘큰 사춘 누이’ 등 주석을 달았다.

 

사진 속 여성들은 모두 백남준의 가족으로, 여성들끼리 모여 동네의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 단체 사진이다.

 

남성 복장을 한 이들이 눈에 띄는데, 백남준 어머니의 제안으로 이러한 가족사진이 완성됐다고 한다. 백남준의 가족들 역시 그 못지않게 자유롭고 개방적인 면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탄생 90주년 ‘백남준 축제’의 일환인 이번 기획전을 통해 1990년대 한국 시각 문화 정체성에 큰 영향을 끼친 백남준의 예술적 성취를 재조명한다”며 “백남준 예술 세계가 더 많이 알려지고, 깊이 연구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내년 2월 26일까지 열린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정경아 기자 ccbbk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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