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의 온고지신] 김덕령

2022.12.22 05:00:00 13면

 

비운의 의병장이었다. 1567년 태어나서 1596년에 옥사했다. 스물아홉. 빛고을 광주 충장로는 충장공 김덕령의 거리다. 이 특별한 젊은이의 죽음은 400년이 훌쩍 넘은 오늘에도 너무나 아깝다. 화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 그 더러운 정치에 들쥐 잡는 들불을 놓고 싶다. 

 

전주이씨들 보다 자부심이 강한 광산김씨다. 율곡과 함께 서인의 원류 유학자 성혼(成渾)의 제자로서 또래들에게 뒤지지 않는 학식을 갖췄다. 열너댓 살 소년이 이미 전국 제일의 씨름꾼으로 이름을 얻었다. 궁술과 기마 등 무사로서의 역량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문무를 겸비한 국보였다. 

 

어린 나이에 벌써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괴력의 소유자였다. 자당께서 호랑이를 품에 안는 태몽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태생적으로 특별한 운명이었다. 

 

중국에 이른바 '4대 기서'(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있다. 내게는 수호지가 1번이다. 나는 '위대한 왕초' 송강(宋江)의 혈맹 공동체인 충의 두령 108명을 모두 좋아한다. 존경한다. 내가 그 시대 山東의 청년이었다면, 해방구 '양산박'(梁山泊)에 들어가서 무송, 노지심, 임충, 흑선풍 등과 우애하며 살았을 거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 氣蓋世: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다)! 덕령은 항우의 후예들 가운데,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던 무송(武松)의 조선판이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 20만 명이 쳐들어왔다. 모친상으로 3년을 시묘(侍墓)하던 덕령을 임진왜란이 불러냈다. 그는 난세의 한가운데로 돌진한다. 1593년 담양에서 5천 명으로 거병했다. 스물여섯 살이었다. 덕령은 전국적인 명성에 걸맞게 특히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곽재우와 협력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이후 조정의 명령으로 이순신과 수륙연합전투를 전개하여 역시 왜적을 대파한다. 

 

덕령의 진가가 본격적으로 발휘될 무렵, 일본과 명나라가 평화협상을 진행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간다.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왜적을 섬멸하고, 활인 구세(活人救世)를 이루려고 의병을 일으킨 영웅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이때 '이몽학의 난'(1596년)이 발발했다. 왕족의 서자 출신 몽학은 국난상황을 악용, 본인이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거침없이 진군, 관군과 의병 연합군을 연파했다. 세력은 천명에서 수천 명으로 급증했다. 조정을 거부하는 민심 탓이었다. 왕은 덕령을 진압책임자로 명했다. 반란은 이몽학이 부하에게 참수됨으로써 끝이 났다. 

 

문제는 주동자들이 김덕령, 곽재우 등이 이몽학과 협력한다는 루머를 퍼뜨린 것이었다. 그 '가짜뉴스'는 선조가 덕령을 죽이는 유용한 재료로 쓰였다. 최악의 정치다. 덕령은 보름간 정강이가 동강 나고 피부가 다 벗겨지는 지옥고문 끝에 요절한다. 이어서 이순신도 같은 고문을 당했다. 임금이 한 짓이다. 구국의 영웅들을 미워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오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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