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자, 다음은 어디로 가시게? 가서 뭘 어쩌시게?

2023.02.02 08:50:03

99. 다음 소희 - 정주리

 

모든 건 다 그놈의 퍼센티지(%) 때문이다. 시청률, 청취율, 지지율, 취업률, 자퇴율, 퇴사율, 할당률, 가입률, 방어율 등등 그저 ‘율율율’하는 세상 탓이다.

 

모든 걸 다 정량평가로만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성평가는 사라진지 오래됐는데 특히 교육분야가 그렇게 됐으며 그건 대략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라며 영어 발음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부 장관 기자회견 때부터 수상한 분위기가 감지됐었다. 정량평가(定量平價)는 양을 중심으로 한다. 무조건 실적 위주다.

 

이에 비해 정성평가(定性平價)는 내용과 가치를 중시하는 평가다. 모든 게 다 정성적이어서도 안되지만 모든 게 다 정량적이어서도 안 된다. 특히 정량평가로만 기울어 있는 사회에서는 결과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모든 걸 다 수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정주리 감독의 의미 있고 인상적인 작품 ‘다음 소희’는 바로 그렇게 정량평가화된 사회가 자행하는, 그 안에서 기생하는 무한대의 관료주의가 빚어내는 비극과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다소 무거운 주제임에도 한치의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긴장을 이어 나가게 한다.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치고 이야기의 직조(織造) 방식이 꽤 촘촘하다. 형식은 비상업적인데 내용 흐름은 상업적으로 짰다. 이 영화가 비상한 스타일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이유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뉘는데, 1부는 취업 준비생 소희(김시은)의 이야기 그리고 2부는 형사 유진(배두나)의 이야기이다. 총 138분의 러닝 타임 동안 두 인물의 스토리는 거의 반반 씩을 차지한다. 소희의 얘기가 조금 더 길긴 하다. 두 인물은 딱 한 번 겹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잠깐 그런 생각이 스친다. 이게 상업영화였으면 배두나의 첫 장면을 영화의 맨 앞단에 배치한 후 형사가 사건의 미스터리를 좇는 구조로 짰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빈번한 플래시 백으로 관객들을 혼란으로 모는 척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욱 높이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 소희’는 마치 영화 두 편을 시간 순서대로 이어 붙이듯 찍고 편집했다. 그건 사건의 전개 뿐 아니라 그 원인과 근인 모두를, 그러니까 정량적이 아닌 정성적으로, 가능하면 자세히 보여 주고 앞일에 대한 책임을 뒤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다 명료하게 보여 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주리 감독이 상업영화적 방식과 그 장르적 특징을 몰라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런 이야기 구조를 밀어붙였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야말로 이 영화의 차별적 경쟁력이다. 영화는 종종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지만 또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다음 소희’는 전체 구성을 짜면서 내용의 강약과 리듬이 결정된 작품이다. 그 선택이 놀랍게 느껴진다.

 

 

소희는 상업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이다. 오프닝 장면은 소희가 한 허름한 연습실에서 이어폰을 끼고 한창 춤을 추는 모습을 담았다. 음악은 묵음이다. 관객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대신 아이가 구르는 발소리, 바닥에 몸을 구르는 소리들만이 이어진다. 오로지 스스로에게 열중해 있는 소희의 모습이 담긴다.

 

땀을 뻘뻘 흘리고 스스로에게 만족해 연습을 끝낸 후에는 푸드 파이터 개인 유튜브를 하는 친구와 곱창을 구워 먹기도 한다. 식당에서 자신들을 비웃는 남자 둘에게 거침없이 시비를 걸고 몸싸움까지 할 정도로 소희는 다분히 욱하는 성격이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서 소개한 한 통신회사의 콜센터에 인턴으로 나가게 된다. 소희 인생의 지옥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학교의 담임선생님은 소희에게 신신당부한다. 학교가 어렵게 일을 잡아 준 만큼 절대로 사고 치지 말라고. 네가 사고를 치거나 일을 조기에 그만 두면 학교의 취업률이 낮아지고 취업률이 낮아지면 다른 회사와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는 데다 (“누가 우리 학교 애들을 데려가겠니?”) 교육부로부터의 재정 보조금 지원이 끊긴다고.

 

실제로 이 교사는 이후 소희에게 이렇게 고함을 지른다. “너 하나 때문에 취업률이 낮아지면 이 회사에서 다시 우리 학교에 인력 지원 요청하겠어? 너는 지금 후배들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거야!”

 

 

콜센터의 지옥은 예상대로 진상 고객들부터 시작된다. 콜센터 직원들은 대체로 고객이라는 이름으로 갑질을 하는 사람들의 ‘짜증받이’가 된다. 욕을 듣기도 하고 성희롱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다음 소희’는 우리 사회의 ‘갑질’에 대한 비판을 주요 테마로 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입률이나 방어율 같은, 그 비율과 그 비율이 자행하는 관료주의에 대해,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얘기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인턴사원 소희는 출근한 지 며칠이 안 돼 바로 이 퍼센티지의 노예로 전락한다. 고객 중의 한 명이 인터넷을 끊거나 다른 통신사로 ‘말을 갈아타거나’ 휴대폰 가입을 해지하거나 하면 난리가 난다. 그러면 콜센터에서는 이 사람을 두고 소위 ‘뺑뺑이’를 돌린다. 이리저리 담당자를 바꿔 가며 새로운 조건을 듣게 하고는 가입 취소를 취소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방어’이고 그게 쌓인 것이 방어율이다.

 

소희는 온갖 수모를 당하며 일을 배워 간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 줬던 팀장(박우영)이 스스로 목숨을 끊자 오히려 악바리로 방어율을 98% 선까지 끌어올린다. 우수사원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월급은 112만 원. 계약서에는 인센티브를 준다고 돼 있지만 다른 항목에는 ‘인턴인 경우에는 지급시기를 조정할 수 있다’로 돼 있다.

 

소희는 점점 절망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 조직 내 모든 장들, 팀장과 지점장, 본사 직원 등을 비롯해 학교(교감, 장학관들)조차 수치를 올려야 한다며 하급 직원이자 아직 고등학교 학생인 소희를 압박한다. 소희는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중에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해결하려 애쓰는 여자 형사 유진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한다. 경찰들조차 늘 막대그래프에 입각한 사건 해결율, 범인 검거율 같은 것에 매몰된 조직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 전체에 그래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학교 교무실 벽에도, 장학사 사무실에는 더욱더 크게, 콜센터 벽에는 하루하루의 개인 방어율과 그에 따른 지점별 성과 그래프 등. 영화 속에 난무하는 그래프의 이미지가 지금 한국사회가 무엇을 지향하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돼 있으며 또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 어떻게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는가를 실토한다. 영화는 점점 더 소희가 겪고 있는 그리고 형사 유진이 동조하고 있는, 그 끔찍한 마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만든 위대한 경제학 개념인 ‘노동의 소외’는 비단 찰리 채플린이 묘사한 컨베이어벨트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소외란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노동의 결과물, 곧 그 상품으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이다. 값싼 임금의 노동자는 자기가 만드는 상품조차 구매할 수 없는 경제상황이다. 하루 종일 공장에서 나사 조이는 일을 하는, 영화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 신세와 같다.

 

‘다음 소희’의 소희는 고객 응대를 하고 고객에게 이런저런 상품을 파는 중개자 역할로 회사조직의 영업에 일조하지만, 돌아오는 월급은 허구한 날 야근에도 불구하고 112만 원이다. 이런 식이라면 한국식 자본주의에서 쉽게 살아가지 못한다. 궁핍 자체가 문제이기에 앞서 궁핍의 사회학이 만들어내는 모멸감과 좌절감, 차별받는 느낌, 사회 변방으로 밀려나 있는 소외된 느낌을 벗어날 수 없다. 21세기형 노동의 소외는 바로 이런 것이다.

 

 

형사 유진은 소희가 겪었던 그 모든 일에 대해 분노한다. 화를 내는 그녀를 향해 학교 교감이든 장학관이든 늘 하는 얘기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뭐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어요?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쥐꼬리만 한 보조금이라도 받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잖아요.” 장학관의 말은 더 걸작이다. “일개 지방 장학관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자, 어쩌시겠어요? 다음에 어디로 가시렵니까. 교육부요?”

 

자, 그렇다면 다음 소희는 누가 될까. 소희 다음엔 또 어떤 어린 청춘이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관료주의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을까. 지난해 있었던 이태원 참사와 그 진상조사 과정도 결국 그 같은 관료주의의 끝판왕이 아니었을까.

 

영화 ‘다음 소희’는 놀랍게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낸 작품이다. 다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답을 알게 된다. 영화는 종종 문제를 던진다. 하지만 그 답은 스스로 알아서 찾으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다음 소희’는 사람들이 답을 알고도 침묵하고, 답을 알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을까 봐 그것이 심히 걱정돼 아예 답을 정확히 알려 주고자 하는 태도를 취하는 작품이다(형사 유진은 교감의 면상을 한 대 때려 붙인다). ‘다음 소희’는 그렇게 사회적 실천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그 사회정치적 태도가 돋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지지를 보내는 이유이다.

오동진 kyunga1013@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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