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할머니의 문장력

2023.05.16 06:00:00 13면

 

철쭉은 자연의 은혜 속에 온통 붉어져 세상을 환하게 꾸미고 있다. 오월의 철쭉은 어린이날과 함께 봄의 절정에 이른다. 그래서일 것이다. 젊지 않은 내 가슴도 은근히 가려운 듯 기분 좋은 웃음이 온 얼굴로 번지고 있는 느낌이다. 봄은 내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 봄은 지금 여름의 무성한 숲을 부르고 있다고. 모든 생명이 지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계절의 물레방아를 힘껏 돌리고 있다고.

 

아파트를 빠져나와 작은 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돌계단을 오르는 길목이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이 길은 좌우로 나란히 철쭉꽃밭길이다. 그 길에 올라서 철쭉꽃 무더기를 뒤로 하고 앞산을 바라보면 가슴 평수가 넓어지며 속 뜰이 개운해진다. 그날 그때였다. 두 아가씨가 제일 높은 돌계단 위에서 나란히 앉아 철쭉꽃 담장을 배경으로 셀프 사진을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꽃과 미인들이 만나는 순간을 나는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철쭉꽃 담장 배경 삼아 셀프 사진에 취한 아가씨를 위해 가던 길 멈추고 못 본 척 기다렸다. 뒤늦게 나를 본 두 아가씨는 감사하다고 하였다. 나는 ‘아닙니다. 꽃과 미인이 만나는 순간, 곁에 있게 된 내가 행운이었다.’고 응대하였다.

 

아침의 숲 속으로 찾아오는 햇빛은 해맑고 곧다. 냉기 머금은 공기에 감사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다 일어서는데, 등 뒤 곧은 나무에 무슨 글씨를 써서 묶어 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 종이에 쓰여 있는 글자를 살펴보았다. 먹 갈아 작은 붓으로 쓴 글자들은 비닐로 덮어씌워 투명하게 잘 보이도록 위아래를 단단히 묶어두었다.

 

‘양심을 – 버리지 맙시다 / 전0가 – 깨끗하다 하는데 / 너무하내요 / 우리가 전0를

지킵시다 / 나도 힘드내요 / 나는 87세 할머니예요 / 함깨합시다.’

 

이 나무 앞 의자 곁에는 그동안 매달아 놓은 쓰레기봉투(비료포대)가 있었다. 그리고 쉬어가는 사람들이 거기에 온갖 오물과 쓰레기를 버렸는데 그것을 할머니 혼자서 지금까지 쓰레기처리장까지 가져다 버렸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공원관리인도 노인 일자리를 꿰찬 분도 아니었다. 고장과 숲을 사랑하는 할머니가 몇 년 동안을 묵묵히 일삼아 처리해 왔다는 고백이었다. 그동안 누군가가 약이나 아이스크림이며 음료수와 커피를 마시고 비료포대에 버리거나 그 옆에 던져놓았던 비료포대는 10여 미터 지점에서 빈 포대로 있고 누가 버린 오물도 없었다.

 

지구의 역사를 하루(24시간)에 비하면 우리 삶은 10초도 되지 않는 지극히 짧은 시간이라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은 역사의 무대에 잠깐 등장하여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역할을 하다가 사라진다고 했다. 내가 오늘 아침 할머니의 문장에 충격을 받은 것은 할머니의 글이 이태준의 저서 『문장강화』 속의 문장론처럼 논리적이고 문법적이며 아름다운 글이어서가 아니다. 할머니의 글은 짧은 문장이지만 강력한 호소력을 내뿜으며 읽는 이의 가슴을 두드리게 하는 이타적(利他的)인 삶에서 오는 감동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권력은 문화적인 감동력이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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