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수프’는 무려 30년 전 ‘그린 파파야의 향기’와 ‘시클로’를 만들어 주목을 받았던 베트남계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홍의 뒤늦은 신작이다.
그는 중간쯤인 2009년에 이병헌, 기무라 다쿠야, 조시 하트넷을 주연으로 내세워 ‘나는 비와 함께 간다’라는 영화를 찍었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실패했다. 그 직후인 2011년에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상실의 시대’를 영화로 만들었고 수작이었지만 역시 흥행에서 실패하면서 오랫동안 메가폰을 잡지 않았다. 젊은 관객들에게 이제 트란 안 홍은 새로운 인물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제목과 달리 프렌치 수프만 만드는 얘기는 아니다. 프랑스 요리, 그것도 만찬을 즐기는 미식가와 요리사, 그 파트너십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 도댕(브누아 마지멜)은 ‘미식계의 나폴레옹’이라 불릴 만큼 음식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요란하고 까다로운 입맛을 20년 동안 채워주고 만족시켜 준 요리사는 여인 외제니(줄리엣 비노쉬)이다. 이 둘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하며 살아가는 연인이다. 둘은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긴 했지만 이제 막 결혼을 하려 한다. 도댕이 줄기차게 결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외제니는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도댕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는 당신의 요리사인가요, 당신의 아내인가요?” 도댕은 과연 무어라 답할 것인가.
영화가 시작한 후 30분간 외제니의 조리 과정이 이어진다. 15분은 순수하게 외제니와 그녀의 조수인 비올레트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과정이, 또 다른 15분은 도댕이 자신의 친구들, 역시 미식가들인 남자들과, 외제니의 음식을 먹고 품평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외제니가 만든 음식으로 만찬을 하기 전 도댕은 견습생으로 들일까를 생각 중인 폴린이라는 소녀에게 부르기뇨트 소스를 한 입 먹게 한 후 무슨 맛이냐고 물어본다. 소녀는, 마치 모짜르트가 세 살 때 절대 음감을 가졌던 것처럼 절대 미감의 특출함으로 하나하나 얘기하기 시작한다.
“소갈빗살이 들어갔고요, 훈제 베이컨도요. 그리고 홍피망하고 버섯, 회향 맛이 나요. 토마토와 오렌지, 와인과 파슬리, 타임과 월계수잎, 커민이 들어갔어요. 노간주 나무 열매와 정향도 들어갔네요.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도댕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폴린의 말을 잇는다. “파프리카와 코냑이 들어갔단다. 까치밥나무 열매와 젤리도 들어갔고. 모두 와인의 산미를 잡기 위해 필요한 거였단다.”
부르기뇨트 소스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식재료로 무려 17가지가 쓰였으며 영화의 첫 장면은 외제니가 그 많은 재료를 썰고, 다듬고, 으깨고, 끓이고, 굽고, 볶고 하는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이처럼 복잡하고 오묘해 보이는, 풍미와 절대적 맛이 가득한 요리를 만드는 내용이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롭고 탐미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한가하고 ‘재수 없는’ 내용으로 비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는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 궁극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어떻게 구현됐느냐에 따라 선택이 좌우될 것이다.
도댕과 그의 친구들은 만찬을 즐기기 전 마치 정식 요리 코스와 같은 현란한 수사들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와인은 만찬의 정신이고 고기와 채소는 물질이지, 라든가 인간은 갈증이 없어도 마실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등등의 얘기들이다.
남자들은 주방에 있는 외제니가 함께 즐기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외제니는 당신들에게 나간 모든 음식은 이미 자신의 혀 속에, 눈 속에, 마음속에서 다 맛을 본 것이라 답한다. 외제니는 어린 폴린이 자신이 만든 오믈레트 노르베지엔(노르웨이 식 오믈렛)을 맛본 후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말에 이 아이가 특별한 재능을 지녔음을 감지한다.
그녀는 연인 도댕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건 그들이 먹은, 무언가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트란 안 홍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에는 분명한 것 몇 가지가 눈에 보인다. 일단 그가 요즘, 아니 오래전부터 음식을 만드는 것, 음식을 만든다는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해 있거나 매우 탐닉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음식을 모르면, 요리를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이런 고급 레시피의 만찬이 준비되는 영화를 찍을 수 없다. 그러니 트란 안 홍은 스스로 요리에 미쳐 있을 것이다. 둘째는 그가 복잡하고 정교한 요리를 완성하거나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요리를 만든다는 것과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다르지 않거나 그 차원을 넘어 매우 흡사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요리라는 특수한 분야는 영화라는 또 다른 특수한 분야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그 둘의 공통점은, 심지어 남녀의 20년 연애나 사랑과도 같은 맥락일 수도 있다는 철학적 통찰로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수가 보편을 만들고 보편을 통해 특수를 더욱 깊고 넓게 만드는 변증의 사고를 이뤄 나갔을 것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따라서, 절대로 프렌치 수프를 만드는 얘기가 아니다. 프렌치 음식을 만드는 얘기 만도 아니다. 이 영화는 인생과 사랑을 요리하고 그 맛을 알아 가는 과정에 대한 얘기이다.
트란 안 홍은 이 영화의 소재가 어떻게 자신이 추구하는 주제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에피소드를 만들어 나간다. 그 매개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파트너십이다.
20년간 계속돼 온 둘의 신뢰는 사랑 때문에, 혹은 요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둘 다일 것이다. 다만 선후는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요리사인가, 아니면 당신의 아내인가는 무엇이 먼저인가를 묻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어느 것이 먼저라 해서 그것이 자신들 관계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감독이 작품을 만들면서 영화와 관객의 우선순위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것과 같은 흐름이다. 영화가 먼저인가, 아니면 관객이 먼저인가. 그 둘은 분리할 수 없다. 때론 영화가 먼저인 작품을 만들 수도 있고 때론 관객만을 염두에 둔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본질은 그 둘의 관계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불란서 식 메뉴와 그 레시피가 줄줄이 이어진다 해서 겁먹거나, 기피하거나, 예단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건 마치 양념과 같은 것이다. 다만 영화가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많은 부분 유리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일 수 있다.
시대 배경은, 유라시아 왕자가 나오는 걸로 봐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일부가 남아 있는 때를 삼은 만큼 1800년대 후반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공화국 혁명과 왕정, 나폴레옹 식 황제의 통치가 엎치락뒤치락 했던 혼란의 100년이 이어진 직후일 것이며 러시아에서는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가 이루려는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 모든 시대의 공기를 배척하려는 듯이 느껴진다.
트란 안 홍의 생각에, 사람들의 삶은 궁극적으로 거대담론의 수레바퀴에서 벗어 날 수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체제나 이데올로기와도 비껴가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며 어느 쪽으로 살아갈 것인가 역시 인간의 절대적 자유의지일 수 있다는 점에 모아져 있다.
가장 순수한 생각의 결정체가 어쩌면 가장 이념적이거나 사회적인 무엇일 수 있다는 셈이다. 비정치적이므로 해서 가장 정치적일 수도 있다는 이 같은 반어적 사상은 현재의 세상이 그만큼 오염되고 타락했으며 극도로 혼란해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런 얘기 역시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건 어디까지 이 영화에 대한 각자의 해석의 차이일 뿐이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패스트 푸드가 넘쳐나는 인스턴트 시대에 맛과 풍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느끼게 해 준다. 매우 뛰어난 수작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통찰의 무엇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음미할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