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44개 동 주민들이 직접 수립한 중장기 ‘우리동네 자치계획’은 행정이 주도하던 기존 도시계획과는 결이 다르다. 외부에서 내려온 개발 청사진이 아니라, 마을 안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경험과 문제의식, 그리고 일상의 언어로 완성된 계획이기 때문이다.
구도심의 노후화, 상권 침체, 생활 인프라 부족, 세대 간 단절 등 각 동이 안고 있는 과제를 주민 스스로 진단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는 환경정비를 넘어 ‘지속가능성’과 ‘공존’이라는 가치가 계획 곳곳에 스며 있다.
◇길을 잇고 사람을 잇다, 보행 중심 마을 전략
이번 자치계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키워드는 ‘길’이다. 길은 단순한 통행 수단이 아니라, 마을의 기억과 상권, 문화와 공동체를 연결하는 매개로 인식됐다.
우만1동은 수원월드컵경기장과 수원화성 인접이라는 지리적 장점을 적극 활용하는 구상을 내놓았다. 주민들은 ‘우리가 함께 여는 만 가지 변화’라는 비전을 세우고, 마을 관광 자원을 발굴해 도보 중심 동선을 구축하기로 했다.
가칭 ‘뚜벅이를 위한 마을 안내 지도’를 제작해 주요 명소를 연결하고, 수국거리·불빛거리 등 테마 공간을 조성해 체류 시간을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동탄인덕원선 개통으로 지하철 접근성이 개선되면 외부 방문객 유입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유동 인구 확대가 상권 활성화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계산이다.
영통3동 역시 ‘도시형 마을길’을 전면에 내세웠다. 수인분당선 영통역을 중심으로 녹지와 공원, 생활 편의시설을 보행 네트워크로 촘촘히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손바닥정원과 산책로, 구름다리, 공원을 잇는 길을 조성해 동서로 단절된 공간을 하나로 묶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노약자를 고려한 무장애 보행 환경을 선제적으로 도입하고, 야간 보행 안전을 강화하는 계획도 포함됐다. 단순한 미관 개선이 아니라 ‘도심 속 웰니스 공간’으로 확장하겠다는 점에서 주민자치의 역량이 돋보인다.
화서2동은 서호천과 서호공원을 중심으로 경관과 안전을 결합한 전략을 마련했다. ‘화기애애, 서로서로, 이어짐’을 키워드로 제시한 이곳은 야간 경관조명 설치와 보행 안전체계 정비를 통해 지역 명소화를 추진한다.
벚꽃 명소로 알려진 서호천길 산책로를 정비하고 스탬프 투어·완주 프로그램을 보완해 일상 속 친수공간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강화하겠다는 접근이다.
◇단절을 넘어 재도약, 구도심의 자치 실험
수원 구도심의 여러 마을은 공통적으로 ‘단절’을 과제로 꼽았다. 개발 혜택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거나, 물리적·사회적 경계로 나뉜 공간을 어떻게 다시 연결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서둔동은 과거 농업연구 중심지였으나 관련 기관 이전 이후 상권 침체와 주거환경 노후화가 진행됐다. 이에 ‘도시와 농업의 중심, 서둔동을 다시 새롭게’라는 비전을 세우고, 주민 통합을 위한 텃밭 조성과 소규모 쉼터 설치, 마을 동아리 활동 강화 등을 계획에 담았다. 생활권 분절 문제를 공동체 활동으로 풀어보겠다는 시도다.
고등동은 신도심과 구도심이 혼재된 지역 특성을 반영해 ‘모두가 어우러지는 따뜻한 마을’을 목표로 설정했다. 빈집을 활용한 마을기업 활성화, 골목마라톤과 지역 축제 등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을 통해 공동체 회복을 꾀한다.
영통2동은 공업지역으로 인해 동서 간 교류가 적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녹지 축을 연결하는 보행 네트워크를 구축, 중심 거점을 조성해 문화 활동을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이다. 물리적 장벽을 심리적 소통으로 극복하겠다는 구상이다.
영화동은 역사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재도약을 준비한다. 장안문과 인접한 북수원 관문이라는 특성을 살려 저층주거지 환경 개선 모델을 발굴하고, 지역 특산품을 활용한 마을기업을 중장기 사업으로 추진한다.
◇생활 환경 개선에서 시작하는 지속가능성
기반시설이 노후한 마을들은 급격한 개발 대신 ‘생활 밀착형 개선’에 초점을 맞췄다.
지동은 문화유산 인접 지역이라는 제약을 고려해 보호수 중심 공원 조성과 성곽 산책로 정비, 스마트팜과 쉼터 등 빈집 활용 계획을 수립했다.
세류2동은 수원천과 다양한 공원을 연결해 ‘깨끗한 물길 따라 모두가 다정한 행복마을’을 구현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수변 공간과 안심 산책로 조성을 통해 친환경 생활 기반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호매실동은 칠보산을 비롯한 생태환경을 강점으로 삼아 공원 접근성 강화와 덮개공원 조성 등을 장기 과제로 설정했다. 입북동은 R&D 사이언스파크 개발을 기회로 삼아 저탄소 자원순환 플랫폼 구축과 지속가능마을 인증을 추진한다.
◇주민이 그린 미래, 행정이 뒷받침
이번 자치계획은 ‘주민이 설계하고 행정이 지원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마을마다 여건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치라는 도구를 통해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속도와 규모 중심의 개발 논리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도시 재생을 모색한 점도 눈에 띈다. 주민의 참여가 축적될수록 계획은 단순 문서가 아니라 실행력 있는 로드맵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번 계획은 단년도 사업에 그치지 않고 중장기 비전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마을 단위에서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예산과 실행 단계를 구체화하는 과정은 주민자치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행정 역시 단순 지원을 넘어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제도적·재정적 연계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수원의 44개 동이 그린 이 미래지도는 거창한 랜드마크보다 사람과 길, 자연과 공동체를 중심에 둔다. 자치계획이 실제 정책과 사업으로 연결될 때, 주민이 체감하는 변화도 현실이 될 전망이다.
[ 경기신문 = 김태호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