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 내 버스·전철 등에서 교통카드를 찍지 않고 지나가기만 해도 자동 결제가 되는 ‘태그리스(tagless) 결제 시스템’ 도입을 함께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오세훈표 ‘기후동행카드’ 사업 참여를 두고 서울시와 경기도가 과도한 공방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나온 뉴스여서 부쩍 관심이 쏠린다. 이 문제는 어디가 먼저냐의 논제가 아니라, 철저히 지역민들의 편의성 제고에 관점이 집중돼야 한다. 수도권 광역 지자체들의 ‘태그리스 결제 시스템’ 도입 추진이 수도권 교통문화에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내길 기대한다. 경기도는 경기도·서울시·인천시 국장급 실무협의회를 통해 각 지자체에 태그리스(비접촉) 기술 확대 협의기구 마련을 제안해 각 지자체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태그리스 시스템은 스마트폰·교통카..
나이 들어도 젊어질 수 있는 역노화 시대가 우리 곁에 와 있다고 한다. 아주대 의대 연구팀은 최근 노인 장기조직에 ‘중간노화세포’라는 새로운 개념의 세포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여기에 적절한 자극을 주면 다시 젊은 세포와 비슷한 기능으로 회복할 수 있음을 규명하였다. 중간노화세포의 기능회복으로 항노화 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고 하며, 그 내용은 2023년 11월 국제학술지 Nature Communications 온라인 판에 발표되었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질병의 일종이며, 그래서 치료될 수 있다는 주장은 하버드 의대 유전학 교수이자 노화와 장수 분야 권위자인 데이비드 싱클레어 박사가 자신의 25년 연구를 집대성한 저작에서 펼친 핵심 내용이다. 그 책이 2019년에 출간되자 도처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우리나라에는 그 다음해 '노화의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고, 그 책에 소개된 소식, 간헐적 단식을 하는 사람이 유행처럼 번졌다. 생명 연장을 주제로 한 대부분의 연구와 저작은 의사, 과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그런데 투자전문가가 이 분야의 책을 내어 또 다른 주목을 받았으니, 2021년에 출간된 세르게이 영의 「역노화」가 그것이다. 그는 장수 분야의 저명한 선각자 50명 이상을 만나 나눈 대담과 최첨단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기업들과 교류한 내용을 토대로, 나이 들수록 젊어지는 로드맵을 제시했는데,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150살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장수란 조기 사망을 예방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노화를 역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건강 데이터나 인공지능을 이용한 헬스케어의 혁신, 표적 항암치료로 알려져 있는 CAR-T세포 치료, 줄기세포를 이용한 장기 이식 및 장기재생 등 의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 속도가 가속화 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2018년에 노화를 질병으로 분류하고, 노화 제어와 치료제 개발을 주요과제로 제시했는데, 이런 결정에 투자자들의 영향력이 한 몫 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미국 바이오벤처기업 턴바이오가 줄기세포 기반의 ‘세포 리프로그래밍’ 기술을 이용하여 피부를 4~5년 전 상태로 되돌려주는 신약을 개발하여 임상이 임박했으며, 이 기술은 장기와 조직의 노화세포도 젊은 상태로 되돌리는 회춘약의 기전이라는 소식이 지난 주 전해지자, 턴바이오에 투자한 국내 제약회사의 주식이 주식 시장에서 테마주로 주목받기도 했다. 과학자와 기업가, 그리고 투자자들은 이미 장수 분야 가능성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정말 장수하기를 원하는가? 병상에서 무기력하게 보내는 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아왔기에, 대다수 사람들은 너무 오래 사는 일은 없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렇듯 사람들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며, 장수연구의 목적도 이와 같을 것이다. 사실 장수보다 더 간절한 바람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사고로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의술과 기술 혁신으로 보통사람과 같이 보고, 듣고, 걸어 다닐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더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머잖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의과대학 정원 확대로 촉발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 국면에 대화와 해결책이 모색되고 있다. 늘어나는 정원이 공공의료 및 지역의료의 공백을 메우게 될 뿐만 아니라 첨단 바이오·헬스 분야 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의사과학자를 양성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전라도 사투리다. ‘쌩’은 ‘생’의 된 발음으로 날것을 뜻한다. 익히지 않은 본연의 것. 가공하지 않은 본래의 것을 강조하고 싶을 때 첫머리에 붙여 썼다. 이를테면, 쌩고구마, 쌩밤, 쌩고기 하는 식이다. ‘가리’는 ‘가루’를 뜻한다. 사투리 그대로 옮겨 쓰면, 밀가리, 쌀가리, 보릿가리, 미숫가리가 된다. 한참동안 잊고 살았던 전라도 사투리를 다시 들은 건 땅끝 해남에서였다. 세 계절을 백련재 문학의 집에서 보냈는데, 함께 살았던 작가들이 전라도 사투리의 달인이었다. 백련재에서의 하루는 “밥은 묵었소?”로 시작해서 “밸일 없지라?”로 끝났다. 소설 쓰는 이 선생은 완도가 고향이었고, 시 쓰는 박 선생은 광주가 고향이었다. 나 역시 장흥 태생이라 전라도 사투리에는 이골이 났는데, 셋이 모이면 쏟아지는 사투리로 푸지고 질펀했다. 그때, 들었던 말이 쌩가리였다. 이 선생의 입에서 나왔는지 박 선생의 말끝에 묻어나왔는지 기억은 없다. 처음 듣는 순간, ‘아, 이런 사투리가 있었지?’ 하고는 박수를 치며 웃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랄까.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쌩가리에 얽힌 추억이 많다. 그중 하나가 전지분유다. 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까, 일곱 살 쯤 먹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드시던 전지분유를 훔쳐 먹다 엄마에게 혼이 났었다. “미친 놈, 할무니 잡술 것을!”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다. 누르스름한 우유가루. 그것이 왜 그리도 먹고 싶었던지. 한 숟가락 떠서 입에 털어 넣으면 바로 녹지 않고 입천장에 달라붙곤 했었는데. 그럴 때 누가 말이라도 시키면, 입에 머금고 있던 우유가루가 뿜어져 나올까봐 우물쭈물하곤 했었다. 이제는 전라도에서도 쌩가리라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쓰지 않으니 잊어버리는 건 당연하다. 잊힘이야말로 사멸의 첫 단추인데, 잊히고 사멸하는 게 어디 사투리뿐일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멸의 시대를 산다. 빠름과 편리와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본연의 것들을 망각한다. 생명이 생명일 수 있는 본연의 것들을. 먹고 입고 자는 데 필요한 뿌리 같은 것들을. 우리는 스스로 벼를 심지 않아도 밥을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산다. 옷도 집도 마찬가지다. 만들어진 옷을 입고 만들어진 집에 들어가 잠을 잔다. 물론, 모두가 농사를 짓고 옷을 만들고 집과 건물을 세울 필요는 없다. 다만 옷과 밥과 집의 근원이, 그러니까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 필요는 있지 않을까. 잉태(孕胎)는 포유류의 전유물이 아니다. 봄은 흩날리는 꽃가루 속에서 잉태하고, 바다는 부유하는 미생물 속에서 잉태하고, 낮과 밤은 녹색별의 뱅글거림 속에서 잉태한다. 알고 보면 볼수록 잉태는 크고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다. 사람 사는 곳도 그와 같아서 잉태하는 모든 것의 뿌리는 작고 단순하다. 거대한 강줄기의 기원이 산기슭에 있는 옹달샘인 것처럼. 전기의 뿌리 역시 석탄과 석유가 아니던가. 그 시커먼 광물이 현대사회라는 초고층시대의 기초이지 않는가. 시커멓고 냄새나는 그것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쌩가리’이지 않는가. 자꾸 눈을 들어 위를 보지 말자. 뿌리가 되고 기본이 되는 것에 눈을 맞추자. 세련되게 가공하였다고 해서 아름답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문학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 세상살이도 그렇더라. 꾸미면 꾸밀수록 묘하게도 조악(粗惡)해지는 게 그것이더라.
늘어나는 거주 외국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인구절벽에 기인하는 국가소멸 재앙에 대응할 이민청(移民廳) 신설을 앞두고 전국 지자체들의 유치전이 치열하다. 지역마다 입지의 정당성을 포장하고 있으나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항만과 최대 공항이 있고, 거주 외국인도 절대적으로 많은 경기·인천지역에 이민청이 설립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외국인 최다거주 지역인 경기도의 경우 시·군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이후 이민청 설립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좌우 정권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이어져 왔다. 지난 2월 초 정부는 완성된 정부안 형태로 ‘출입국·이민관리청(이민청)’의 골격을 완성한 다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여당 간사인 정점식 의원이 그 내용을 담아 정부조직법 개정안으로 대표발의했다..
지난 2019년 선거법이 개정됐다. 주요 골자는 유권자 연령의 하향 조정이었다. 기존 19세에서 18세로 선거권 확대. 한국 정치인들은 “서구 선진국에서는 16, 17세부터 선거권이 있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라며 하향조정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정치권에 묻고 싶다. 진정 무엇을 위한 하향 조정인가? 그냥 선진국 따라 하긴가? 아니면 대의제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한 수단인가? 만약 후자였다면 젊은 유권자를 위한 상품 출시에 힘써야 한다. 젊은이들을 선거판에 불러놓기만 하고 그들이 고를 상품이 없다면 이는 상도덕에 크게 어긋난다. 오는 4.10 총선의 메뉴를 보면 알 수 있다. 후보들은 도시화, 경제개발만 하겠다고 야단들이다. 너도나도 철도 지하화, 공항이전, 서울편입, GTX 연장 및 건설, 녹지대 개발, 아파트(재)건축 등을 약속한다. 70년대 개발도상국 시절의 공약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런 종류의 공약은 기성세대에게는 먹힐지 모르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통하기 어렵다. 청년들에게 더 이상 투표는 의무가 아니다. 그들은 살 상품이 없으면 투표장에 나갈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된다. 이런 논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노년층은 투표장에 나가는 데 왜 젊은 층 너희는 안 나가냐며 볼멘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어디 이뿐인가? 모(某) 국가처럼 투표를 의무화 하자는 소리까지 하는 판이니 참으로 답이 없다. 물론 젊은이들의 기권은 새로운 일도 아니고,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이 현상은 선거 때마다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젊은 층은 사회생활에 덜 밀착돼 있기 때문에 투표율이 낮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세대적인 차가 크다. 기성세대에게 투표는 훌륭한 시민의 의무였다. 반면에 젊은이들은 선거에 무언가 할 말이 있을 때 투표를 한다. 프랑스의 경우 많은 청년이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이 공약을 늘어놓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우파 후보가 내놓는 공약과 좌파 후보가 내놓는 공약이 거의 동일하다.” “정치인들은 말만 번지르르한 ‘담론’ 사업가로, 그들에게 속아 제품을 사면 그 이후엔 작동하지 않는다.” 등의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기성 정당들이 한국처럼 젊은 세대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학자 피에르 브레숑은 젊은이들이 기권하는 것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자신의 즐거움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고,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한다. 젊은 세대가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투표장에 나가지 않는 게 아니라 투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기권하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경제개발 공약만 앞세우면 그들이 어찌 선거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22대 총선, 청년이 아닌 기성세대만 잔뜩 나와 투표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회는 후퇴하고 말 것이다. 이 재앙을 피하려면, 후보자들은 과거 정책만 복사해 던지기보다 진정성 있게 그리고 신선한 정책으로 유권자를 보다 폭 넓게 유인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20일 수원시 화성사업소와 경기문화재단돌봄센터가 경기문화재단 회의실에서 행궁동 주민 마을장인 육성을 위한 업무협력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의 내용은 두 기관이 손잡고 ‘수원화성 마을장인’ 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 사업은 수원화성 성안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훼손된 경미한 문화재를 직접 보수할 수 있도록 문화재수리기능자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수원화성이 감싸고 있는 마을 행궁동 주민을 대상으로 교육생을 모집해 이론과 실기교육을 실시한 후 문화재수리기능 자격증 취득자를 마을장인으로 선발, 직접 문화재 관리·보수를 맡긴다는 계획이다. 이들은 경미한 훼손을 직접 보수하게 된다. 이를테면 성벽의 줄눈과 지붕기와 와구토 탈락, 연못관리, 배수로 정비 등이다. 수원시에 따르면 지역주민을 문화재수리기능자로 육성해 직접 문화재 보..
4월 총선을 앞두고 전화 여론조사가 늘었다. 모르는 번호면 여론조사겠거니 받지 않거나 수신 거부를 했는데 얼마 후 또다시 전화가 걸려 온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받으면 어김없이 여론조사 녹음 소리다. 바빠서 못 하는 것도 있지만 여론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아 일부러 피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설문에 응답하는 사람의 경우 어떤 질문에든 답할 준비된 상태일 확률이 높은데, 그래서 정당이나 후보 이름만 들어도 어떻게 선택할지 결정의 시간을 크게 들일 필요가 없으니 응답을 수월하게 느낀다. 반대의 경우라면 질문의 내용과 선택해야 할 내용만 들어도 선택결정 어려움 앞에서 피로를 직감한다. 자연스레 응답을 피한다. 정치 관여도가 높은 응답자 확보가 많은 조사라면 모집단 전체 표심과는 다른 분포를 보일 수 있다는 의미다. 흔히 중도층이나 무당층으로 불리는 스윙보트가 여론조사에 얼마나 참여하느냐가 조사의 신뢰를 좌우한다고 보는 까닭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신뢰하기는 어려우나 현실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후보 공천부터 정부 정책까지 결정의 근거로 삼는 게 여론조사인 경우가 많아서다. ‘여론조사 결과가 곧 여론’인 현실은 선거철만 되면 여론조사기관이 성황을 이루는 것만으로 짐작 가고 남는다. 언론사 내부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풍경이 많다. 후보 선호도 조사를 했는데 다른 기관과 결과가 다르면 이대로 보도를 내도 괜찮은지 우왕좌왕하는 식이다. 오차범위 안에서 접전이 벌어졌다는 표현은 앞섰다거나 우위를 점했다는 단정적 표현보다 일부 나아진 표현이긴 해도 단편적인 정보라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표본의 수나 응답률이 작은 것은 어떤가? 3월 둘째 주 전국 단위 선거여론조사 7건의 주요 데이터를 정리한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발표를 보면 조사별 표본수는 2천명 내지 1000명이다. 접촉률은 18.1%~36.2%로 응답자가 전화를 받거나 응답을 시작했으나, 최종 모든 질문을 완료했다고 보는 응답률은 3.9%~14.7%로 한참 낮다. 사람이 녹음한 소리를 들려주느냐 기계음 질문을 들려주느냐 사람이 직접 문항을 읽느냐처럼 조사 방식의 차이가 응답률에 영향을 미친다. 조사 시점도 중요하다.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선호는 조사 당시 응답자가 인지하는 상황적 요인을 고려한 결과이기도 해서다. 언론의 의제 설정과 이슈 프레임이 얼마나 지각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선호 의사를 바꿨다기보다는 조사에 응하는 집단이 달라진다. 한마디로 단기적 쏠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언론은 여론조사가 모집단의 극히 일부의 의견을 확인하는 장치라는 점에서 효율적인 방식이나 민심을 정확하게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보도해 주었으면 한다. 여론조사에 대한 대중적 불신의 원인은 숫자가 아니라 이를 이용하는 언론과 정치에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 알지 않는가.
미국 군복을 입은 한 젊은 남자가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그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애런 부쉬넬이다. 나는 미합중국 공군 현역 군인이고 더 이상 제노사이드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극단적인 시위를 할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식민지배자들의 손에 당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전혀 극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는 곧이어 카메라를 땅에 내려놓고 텀블러에 담아 온 휘발유를 온몸에 뿌린 후 불을 붙였다. 25살 애런 부쉬넬은 그렇게 2월 25일 워싱턴 DC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분신자살했다. 산화해 쓰러질 때까지 그가 수차례 외친 구호는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 였다. 반이스라엘 저항운동을 하다 숨진 미국인은 애런 부쉬넬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 3월에는 레이첼 코리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의 가옥..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것은 모두가 질문의 산물(결과물)이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려면 반드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비롯된다. 그러기에 교사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 하려면 반드시 학생들에게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대체로 교사는 교육 현장에서 교과서에 있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리고 수업 막바지에 “오늘 배운 내용(교육과정) 가운데 이해가 잘 안되면 질문하라”고 한다. 이런 질문을 할 때 교사는 답을 가지고 질문한다. 당연히 교사는 자기가 가르친 내용이 정답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교사가 정답이라고 단정한 지식은 이미 특정 분야에서 전문 학자들이 오랜 기간 탐구하고, 경험한 결과의 지식이다. 문제는 결과의 지식으로는 학생들의 창의성 함양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교사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학생들은 암기해 두었다가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하면 자신이 가르친 지식을 학생들이 그대로 먹었다가 그대로 뱉어내는 것이다. 교사가 정답을 가지고 질문하면 학생들의 지적변화에도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질문은 결코 좋은 질문이라 할 수 없다. 좋은 질문이 되려면 하나의 질문에 학생마다 답(표현)이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궁금증과 호기심은 학생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교사가 질문할 때 좋지 않은 태도는 자신만의 답을 미리 가지고 질문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질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좋지 않은 질문의 예를 들어보면 ‘예(Yes)’ 아니면 ‘아니오(No)’를 유발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이런 유형의 질문을 해야만 할 때는 한 번 더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예라고 반응한 준영이한테는 “너는 왜 ‘예’라고 생각하니?” 또는 아니라고 반응한 준홍이에게는 “너는 왜 ‘아니오’라고 생각하는 거니?”와 같은 질문은 준영이와 준홍이의 생각이 다르기에 질문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질문은 하나의 질문에 여러 개의 답(반응)을 끄집어낼 수 있는 질문이다. 학생에게 있어서 교사의 질문이 중요한 것은 그 질문에 반응(답변)하기 위해 학생들이 여태껏 배워서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기 때문이다. 이때 뇌세포는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변화를 일으킨다. 이를 인지심리학에서는 ‘인지구조의 변화’라고 한다. 이는 곧 교사의 질문을 통해서 학생의 인지구조의 변화를 일으켰기에 교육의 효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질문은 문제의식의 자극제 역할을 한다. 문제의식은 문제해결의 실마리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문(自問)을 통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문제의식은 이를 가진 자가 문제해결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래서 문제의식은 문제해결의 요체(要諦)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항상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예리한 질문을 통해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해결의 시발(始發)인 문제의식을 유도하는 ‘질문’을 학교 교육의 근간(根幹)으로 삼아야 비로소 학생들의 창의성이 길러지고, 그 열매를 맺고 수확하게 될 것이다.
이종섭 호주대사가 21일 귀국했다. 출국금지 상태에서 호주대사로 임명된 후 많은 논란을 뒤로한 채 지난 10일 출국한지 11일 만이다. 외교부는 방위산업 관련 공관장 회의 참석차 귀국한다고 설명했다. 외교가에서는 출국금지된 피의자 신분 상태에서 호주대사로 임명된 것도 이례적이지만 급조한 듯한 방위산업 관련국 공관장 회의를 명분으로 귀국한다는 것도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귀국 사유는 방산협력 주요국 공관장 회의 및 5월 초 한-호주 외교·국방 2+2 장관회의 사전조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본지 취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은 25일 예정이라고 외교부가 발표한 공관장회의는 지난 20일에 결정됐다. 외교부 관계자는 “지난 해에도 방위산업 공관장 회의가 두 번 있었지만 모두 화상회의로 진행됐다”며 “주요국 대사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