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을 만들려면, 5m 높이의 나무 한그루가 필요합니다. 그 나무가 온전히 자라는데 걸리는 시간은 30~60년입니다. 나무의 전 생애를 바쳐야 책 한 권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노르웨이에서 가문비나무 묘목 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2014년에 심어진 이 나무들은 백 년 동안 베지 않습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작품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한 사람의 작가에게 한 편의 작품을 부탁했습니다. ‘마가렛 앳우드’, ‘데이빗 미첼’ 등이 요청에 응했습니다. 요청에 응한 작가 중에는 우리나라 소설가 ‘한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꺼이 내놓았지만 작품은 누구도 읽을 수 없습니다. 모아진 작품들은 단단히 봉인되어 오슬로 공공도서관 ‘침묵의 방’에 백 년 동안 보관됩니다.
봉인된 작품을 읽으려면 백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봉인은, 가문비나무 천 그루를 심었던 2014년부터 정확히 백 년 뒤인 2114년에 풀립니다. 봉인이 풀린 작품을 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2014년에 심은 천 그루의 가문비나무입니다. 백 년 전에 심었던 가문비나무 천 그루로 백 편의 작품을 책으로 묶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래도서관’이라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케이티 페터슨’에 의해 기획되었습니다. 미래도서관 프로젝트는 미래 세대에게 우리의 문화와 가치를 전달하는 독특한 방법입니다. 그를 통해 지금의 희생과 기다림이 어떻게 미래의 가치와 만날 수 있는지 탐구하는 참신한 시도이기도 합니다. 저자와 작품명만 명시되었을 뿐, 공개하지 않은 작품들은 지금도 미래도서관 침묵의 방에 봉인되어 있습니다.
‘백년’을 되뇌다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교육’입니다. 흔히들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교육현실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백년이라는 오랜 기다림을 감내하면서까지 현재와 미래 가치를 아우르는 프로젝트에 돌입했습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도 백년을 투자하는데,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은 어떠합니까? 지혜는커녕 지식을 익히기에도 버거운 곳이 학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는 사색과 성찰에서 나오지 암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외우고 셈을 잘해도 인공지능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그렇게 달달달 외운 숫자와 단어와 참고서 속에는 인공지능시대를 열어젖힐 열쇠가 없습니다.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우리나라처럼 똑똑한 아이들은 없습니다. 그렇게 똑똑한 아이들을 우리의 교육은 바보로 만들고 있습니다. 누군가 했던 말처럼 ‘한국교육은 천재의 무덤’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합니다. 대한민국은 대학입시문제를 기계로 채점하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객관식 문제에서 답을 고르는 입시로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정답 찍는 기계를 양성하는 것이 교육이라면, 학생들을 가르칠 게 아니라 인공지능에게 자료를 입력시키는 게 빠릅니다. 성적이 곧 교육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적만능주의가 우리의 아이들을 자살로 내몰고 있습니다. 성적만능주의가 우리의 선생님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고 있습니다.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학살입니다.
노르웨이에 미래도서관 프로젝트가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성적만능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한국 교육이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미래 세대에게 현재의 아둔함을 전달하는 독특한 방법입니다. 아울러 학생과 선생의 희생이 미래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수 있는지 탐구하는 서글픈 시도이기도 합니다. 희생자의 이름과 향후 대책만 발표되었을 뿐, 공개되지 않은 아픈 사연들은 지금도 ‘침묵하는 양심’ 깊숙이 봉인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