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출신의 촬영감독인 브누아 델롬의 첫 장편 연출작 ‘마더스’의 영어 원제는 마더스 인스팅트(Mothers’ Instinct)이다. 어퍼스트로피 s가 앞이 아니라 뒤에 찍혔다. 그러니까 엄마의 본능이 아니라 엄마들의 본능 혹은 엄마들의 직감이라는 뜻이겠다.
극 중 엄마가 복수하는 얘기이고 제목만으로도 두 엄마의 갈등, 음모, 범죄의 느낌이 나되, 그게 다 엄마 곧, 모성애의 발로나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2018년 올리비에 마셰 드파스가 만든 ‘뒤엘(Duelles, 대결)’을 리메이크한 영화이다. ‘마더스’는 제목을 원래대로 했다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를 수 있는 작품이다.
데미언-셀린 부부와 사이먼-앨리스 부부는 이웃간이다. 데미언(조쉬 팔스)은 제약회사에 다니고 사이먼(앤더슨 다니엘슨 라이)은 회계사이다. 셀린(앤 헤서웨이)은 예전에 간호사였고 앨리스(제시카 채스테인)는 기자였다.
네 사람 모두 40대 초반들이고(넷은 어느 날 케네디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가 너무 젊다고 데미언이 얘기하자 사이먼의 아내 앨리스는 "케네디는 43, 당신은 42이라며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중산층이며 막 상류층으로 갈 수 있을까 말까, 그 중간쯤 서 있는 화이트칼라 집안들이다. 이런 이웃일수록 당연히 아내끼리 친한 친구가 되는데 셀린과 앨리스는 각각 맥스와 테오, 8살짜리 동갑내기 아들을 키우며 더욱 더 가까워진 관계이다. 둘은 번갈아 가며 아이들이 하교할 때 데리러 갈 정도의 사이이다. 맥스와 테오, 아이 둘도 더없이 막역하게 지낸다.
문제는 사고가 터진다는 것이다. 셀린의 아들 맥스가 어느 날 새집을 나무에 건다며 2층 발코니 난간에 올라 섰다가 추락사한다. 이웃의 앨리스는 아이가 난간에 올라갔던 바로 그 순간을 목격했고 옆집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엄마인 셀린은 아래층에서 전기 청소기로 청소를 하고 있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셀린이나 앨리스나 두 사람 모두 이후 슬픔과 죄책감이라는 두 감정 사이의 골짜기에서 기이한 증오와 분노에 시달리게 된다.
셀린과 앨리스는 맥스가 죽은 것이 서로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또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라며 이성적인 생각으로 돌아와 서로를 위안하기 일쑤이다. 왔다 갔다의 싸움을 반복하는 사이 두 집안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잇따른다.
앨리스의 시어머니가 정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가 하면 셀린의 남편 데미언은 결국 자살을 한다. 워낙 신경쇠약증이 있었던 앨리스는 이 모든 일이 셀린이 꾸민 일, 자신에게 왠지 아들 맥스의 복수를 하려는 계획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셀린은 셀린대로 앨리스가 점점 더 과대망상증이 심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여자의 '뒤엘' 곧, 대결이 시작된다. 누구의 짓일까. 앨리스의 정신이상일까. 셀린의 교묘한 범행일까.
원작은 2018년 ‘뒤엘’이라고 했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샤론 스톤과 이자벨아자니가 나왔던 1996년작 ‘디아볼릭’과 1974년 존 바담 감독이 만든 ‘애증의 덫’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조 격인 1955년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릭’을 닮아 있다.
물론 ‘마더스’는 이들 작품과 이야기와 줄거리가 전혀 다르지만 서스펜스, 곧 그 극적 긴장감의 분위기를 닮으려 했다는 점에서 드라마의 주조(主潮)를 ‘디아볼릭’에서 가져오려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예컨대 이런 서스펜스의 분위기를 말한다.
앨리스는 셀린이 차를 몰고 외출하는 것을 창 밖으로 지켜보다 그녀 집의 열쇠를 갖고 이웃집으로 몰래 들어 간다. (둘은 집 키를 서로 나눠 가질 만큼 친한 사이였다.) 앨리스는 셀린 집 지하에 가서 약품함을 뒤지려 하지만 잠겨져 있다. 그때 셀린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지하에 있던 앨리스는 황급히 불을 끄고 계단 밑으로 몸을 숨긴다.
셀린은 지하로 가는 문이 약간 열려 있는 걸 보고 의아해 한다. 셀린은 지하로 내려가지만 몸을 숨긴 앨리스를 보지 못한다. 관객 눈에는 지하 차창으로 들어오는 불빛으로 앨리스의 얼굴 일부가 보이지만 정작 셀린은 알아채지 못한다.
셀린은 다시 1층으로 올라가고 앨리스는 조금 후 안도의 한숨을 쉰 후 올라가지만 막상 1층에서 기다리던 셀린에게 들키고 만다. 둘은 심한 말싸움을 벌인다. 둘의 말싸움은 이후 점점 더 심한 몸싸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둘의 대결은 심해진다. 영화 ‘마더스’는 엄마 둘, 여자 둘의 대결, 그 결투가 점점 더 선을 넘게 되는, 그 점층법의 서사가 잘 짜인 작품이다.
엄마의 본능, 직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엄마는 아이가 아프려고 하면 이미 그 전조를 몸으로 감지한다. 아이들과 정신이 연결돼 있는 엄마들에게 자식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험과 같다. 아이가 죽으면 엄마는,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를 대체할 무엇, 대신할 누구를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종종 그것은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한다. 모성애는 때론 너무 지나쳐서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파국으로 만들 때가 많다. 영화 ‘마더스’는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두고 43살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인 1960년인 것으로 보인다. 케네디는 61년에 대통령이 됐다. 60년 현재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으며 공화당 정부가 집권하던 시절이다.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새로운 개척 정신)’을 내세우며 대선 캠페인을 성공시켰다. 당시 미국은 2차 대전과 한국 전쟁 등을 딛고 일등 국가로 올라서고 있을 때로 셀린-앨리스 집처럼 신흥 중산층들이 양산되던 때였다.
그러나 곧 케네디의 암살을 전후해 60년대 미국 사회는 극도의 분열과 갈등으로 접어들게 되고 결국 이들 중산층 사회가 몰락하게 되면서 미국은 계급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화된다. 지금 미국의 문제는 바로 이때, 60년대 형성된 진보적 중산층 가정의 붕괴와 분화로부터 시작된 셈이라는 것이다.
모성의 가치가 언제부터 변질됐는가, 언제부터 정신 이상적이 되어 갔는가를 지켜보는 건 다소 아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모성애가 이상성을 지니게 된 이상 가정과 사회는 복원되기가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브누아 델롬 감독이 그런 고차 방정식까지 고려하며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감독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정치사회학을 스스로의 작품에 배태(胚胎) 시키곤 한다. ‘마더스’에는 그런 사회성이 담겨 있다.
제스카 채스테인과 앤 해서웨이의 연기 대결은 거의 불꽃이다. 채스테인은 77년생이고 해서웨이는 82년생이다. 여전히 뛰어난 미모를 유지하면서들, 연기력은 보다 더 고급스러워지고 지적이면서, 매력적이고 육감적이 됐다. 둘 다 연기력 면에서 지금이야말로 전성기임을 보여 준다. 두 여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찾아볼 만한 작품이다. 지난 3일 개봉됐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60년대 초 미국의 한 가정사를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갖는 위기의 정서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안하고 불길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가 무너지면 가정이 붕괴한다. 모성이 왜곡되면 사회가 망가진다. 그건 언제 어디서나 다른 말로도 적용되고 응용될 수 있는 명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