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가 구축한 '보라 월드'…환상 서사에 투영한 '호러 현실'

2022.05.27 11:20:43

'저주토끼' 호러·판타지 색채…섬뜩한 반전에 씁쓸한 상실감도
다른 작품도 독특한 매력…슬라브 문학·사회참여적 삶의 궤적 응축

 

26일(현지시간) 세계적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 수상에 아쉽게 고배를 마신 정보라(46) 작가는 과학소설(SF)과 호러, 판타지 등 장르를 넘나들며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줬다.

 

자유로움과 환상성이 강한 슬라브 문학 전공자로서의 면모, 시위 현장을 누벼온 사회참여적 삶의 궤적, 현실보다 무서운 호러물을 창작하고 싶은 취향을 서사로 엮어냈다.

 

순수문학주의가 강한 국내 문단에서 장르 문학은 작품성 영역에서 소외된 측면이 있지만, 그의 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는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 심사위원들로부터 호평받으며 한국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줬다.

 

◇ 장르 넘나든 초현실적 서사, 씁쓸한 이야기 모음

 

2017년 출간된 '저주토끼'는 호러, 판타지, SF 경계를 넘나드는 초현실적인 이야기 10편 모음집이다.

 

현대 사회와 자본주의의 공포와 잔혹함, 인간의 상실감, 여성주의적 시각을 섬뜩한 반전, 유머와 아이러니를 섞은 문체로 풀어냈다. 일상의 이야기 같으면서도 비현실적이고, 무서우면서도 흥미롭고, 끝내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은 정보라 특유의 작법이다.

 

정 작가는 최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저주토끼' 단편에 영향을 준 작품으로 어린 시절 본 공포 사극 '전설의 고향'을 꼽으며 "한국과 일본, 중국의 괴담이나 도시 전설 같은 방식으로 쓰고 싶었다"고 했다.

 

표제작 '저주토끼'는 저주 용품을 만드는 할아버지가 경쟁 업체 비방으로 몰락한 친구의 원한을 갚고자 만든 저주토끼가 잔인한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정 작가가 환상호러 웹진 '거울'에 12지신 중 동물을 택해 소설을 한 편 쓰는 데서 출발했다. 최약체인 귀여운 토끼를 최대한 무섭게 그려보기로 했다.

 

여기에 과거 이른바 '쓰레기 만두' 파동으로 억울하게 파산한 회사 이야기와 군사독재 시절 쌀 자급자족을 위해 쌀로 전통주를 빚는 양조장의 맥이 끊길 뻔한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서사를 꾸몄다.

 

수록 단편인 '머리'와 '차가운 손가락', '몸하다', '덫', '흉터' 등도 전반적으로 긴장감과 환상성이 강한 작품들이다.

 

배설물과 오물로 빚어진 피조물이 변기 안에서 튀어나와 주인공을 어머니라 부르고('머리'), 덫에 걸린 여우를 잔혹하게 학대한 남성의 가족이 끔찍하게 파괴되고('덫'), 피임약을 복용하던 여성이 성관계 없이 임신한다('몸하다').

 

등장인물들은 주로 절망하고 분노하고 배신당하는데, 작가는 이들 이야기를 통해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복수를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외롭다"고 얘기한다.

 

'저주토끼'를 출간한 영국 독립출판사 혼포드스타의 앤서니 버드 대표는 연합뉴스에 "'저주토끼'는 독특하고 흥미진진하며 아름답게 쓰이고 번역된 책"이라고 말했다.

 

◇ 다른 작품도 조명…장르 넘나들며 삶의 질문 녹여내

 

국내 독자들이 정보라를 '발견'하면서 그의 다른 작품들도 조명받기 시작했다.

 

2008년 계간 '판타스틱'에 단편 '죽은 팔'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 작가는 장편 '붉은 칼'과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소설집 '그녀를 만나다', '저주토끼', '왕의 창녀', '씨앗' 등을 펴냈다.

 

초기작에 해당하는 '문이 열렸다'는 늑대 인간과 달걀귀신의 사랑 이야기이며, '죽은 자의 꿈'은 죽은 자를 보는 주인공이 동창의 죽음을 파헤치는 호러 스릴러다. 나선정벌을 모티브로 그 세계를 우주로 확장한 '붉은 칼'과 소설집 '그녀를 만나다'는 SF 색채가 강하다.

 

SF 작가들이 회원으로 있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는 "'죽은 자의 꿈'과 '저주토끼'는 정보라 작품 세계의 전형적인 특징을 담은 이야기"라며 "특히 '죽은 자의 꿈'은 으스스한 분위기와 약자에 대한 연대, 폭력과 거짓을 무기로 사용하는 자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어 작품 경향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정 작가는 리얼리즘에서 비켜나간 환상성 강한 세계를 만들고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부커상 심사위원회가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시위 현장에서 느낀 사회의 부조리, 현대사회 속 여성·소수자 등을 향한 연대 목소리를 작품에 반영하고 인간의 상실감 등을 탐구했다.

 

단편 '그녀를 만나다'에서는 삶의 궤적에 따른 질문이 거침없이 노출됐다. 근미래, 120세 주인공 여성이 과거를 돌아보는 대목에서 "내가 기억하는 기계는 사람을 죽였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서 멀쩡한 청년이 죽었고, 크레인이 무너져서 밑에 있던 사람을 깔아 죽였고"라며 분노를 드러낸다.

 

이지용 SF 평론가는 "정 작가는 공포 스릴러물에 환상적인 세계의 텐션을 높게 가져가면서 자신의 의문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집필한다"고 설명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인 복도훈 문학평론가는 "장르물을 접합한 정 작가의 소설들은 특유의 호러 분위기를 동반하고, 아이러니하고도 풍자적으로 현실을 비트는 방식이 독특하다"며 "호러나 초현실적인 재현은 작가가 번역한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의 환상적인 작품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다른 작품의 장점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고 평했다.

연합뉴스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