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이 국내 주요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10년째 이어지며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흡연으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손실을 이유로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에 533억 원의 배상을 요구하며 시작된 이 소송은 2020년 1심에서 패소했지만,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앞서 건보공단은 지난 2014년 폐암과 후두암 같은 흡연 관련 질환의 주요 원인으로 담배를 지목하며, 환자 3465명에게 지급된 건강보험 급여 비용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흡연이 소세포암 및 편평세포암과 같은 폐암 유형과 후두암 발병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담배회사들이 중독성과 위험성을 축소하거나 은폐했다고 주장하며 제조물 책임과 불법 행위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2020년 1심 재판부는 ▲흡연 이외 요인에 의한 질환 발병 가능성 ▲담배 제품의 설계·표시상 결함 부재 ▲담배 중독성 축소 은폐 불인정 등을 이유로 건보공단의 주장을 기각했다. 흡연과 질병 사이의 명확한 인과관계 입증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불복한 건보공단은 2020년 12월 항소를 제기하며 현재까지 10차 변론을 진행 중이다. 다음 변론에서는 흡연과 질병 간 인과관계를 놓고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질 전망이다.
건보공단은 이번 소송에서 ▲흡연과 질병 간 인과관계 ▲담배회사의 제조물 책임 ▲담배회사의 불법 행위 ▲손해배상 범위 등을 주요 쟁점으로 삼고 있다. 특히 흡연으로 인한 피해가 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되고 있음에도, 국내 법원이 담배회사에 대한 책임을 엄격히 묻지 않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 해외는 천문학적 배상 판결…한국은 왜?
해외에서는 이미 유사한 사례에서 담배회사에 천문학적 배상 책임을 부과한 판례가 있다.
미국에서는 1998년 담배회사들이 46개 주 정부와 합의하며 2060억 달러(약 275조 원)를 배상하기로 결정한 바 있으며, 1999년 미 연방정부가 7대 담배회사와 2개 담배연구소를 상대로 부정부패조직범죄방지법 위반으로 제소, 담배회사 위법행위가 인정됐다.
캐나다에서도 2015년 퀘벡 법원이 담배회사들이 제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며 325억 달러(약 43조 원)의 배상을 명령했고, 이 판결은 항소에서도 유지됐다. 피해자들은 최대 6만 달러씩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반면 한국에서는 흡연 피해 관련 소송이 대부분 담배회사의 승리로 끝났다. 한국에서도 1999년 폐암 환자가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첫 소송 이후 개인과 집단이 연이어 소송을 제기했으나, 모두 담배회사의 승리로 끝났다. 법원은 흡연과 질병 간 명확한 인과관계를 요구하며 과학적 증거 부족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흡연으로 인한 질병 발병의 과학적 근거가 충분함에도 국내 법원이 지나치게 높은 입증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 소송 승소 시, 금연 정책 전환점 될까
건보공단의 이번 소송은 흡연으로 인한 건강 피해와 담배회사의 책임을 법적으로 규명하려는 첫 대규모 공적 시도였다. 건보공단이 승소한다면 국내 담배 규제와 금연 정책에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다.
승소 시 담배회사들의 제조물 책임과 불법 행위가 인정됨에 따라 정부는 강력한 금연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담배 판매 규제 강화, 금연구역 확대, 금연 캠페인 활성화 등 구체적 변화가 뒤따를 가능성이 크다.
건보공단은 배상금 일부를 금연 보건 프로그램 확대와 건강보험 재정 강화에 활용할 계획이다. 또한, 흡연 피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높여 담배 소비 감소와 금연 문화 확산에도 기여할 수 있다.
◇ "흡연 폐해, 개인 아닌 사회 문제로 봐야"
건보공단은 이번 소송을 통해 흡연 폐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담배회사의 책임을 공론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공단 관계자는 “흡연으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손실을 줄이고, 담배의 유해성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국민 건강 증진과 담배 규제 강화를 위한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흡연 문제를 둘러싼 이번 소송의 결과는 단순히 배상금 문제를 넘어 국민 건강과 담배 규제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 경기신문 = 오다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