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익” 커브를 돌자 갑자기 뒷바퀴가 몸에서 떨어져나간 다리처럼 제멋대로 허우적거렸다. 차는 크게 S자를 그리면서 미끄러져 나갔다. 브레이크를 밟은 오른발에 ‘드드드득’ 하는 잔망스러운 느낌이 전해져 왔지만 차는 멈추질 않았다. 건너편 차들이 황급히 멈추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 운전자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순간 스쳐갔다. 차는 중앙선을 크게 지나 겨우 멈춰 섰다. 등골이 오싹했다. 살살 차를 몰아 갓길에 세웠다. 엄동설한에 배달 일을 시작한지 불과 일주일 만에 생긴 일이다. 2022년을 코앞에 둔 지난 연말에 나는 큰 결심을 했다. 그렇게 계속 살 수는 없었다. 우선 생활비가 바닥났고, 빚은 늘어만 가고, 둘째는 고3이 되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배달 일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몸뚱이 하나만으로 돈벌이가 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1톤 트럭을 출퇴근용으로 제공한다는 사장의 말에 혹했다. 나는 운영하던 회사를 휴업하고 법인차를 처분하여 차가 없었다. 한편 마음이 시끄러울 때 몸 쓰는 일이 정신건강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2-3년을 돌이켜보니 나는 심신이 너무나 황량하게 지쳐있었고 생활은 건강하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 살다가는 폐인이 되겠구나
사람들은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이라고 불렀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지난 26일 오후 9시 20분께 송파구 석촌동의 한 주택 지하 1층에서 이 집에 살던 박 모(60)씨와 두 딸 A(35) 씨, B(32)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 현장에서는 현금 7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가 나와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나는 왜 이 세 모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장애인 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국민연금이 나올 시기도 아니고, 마땅한 직장조차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기초생활 수급자였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국가에서 생계비 보조를 받았을 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성장한 두 딸이 있었는데 두 딸도 직장을 다닐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 혼자 식당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세 모녀를 살릴 수 있는 대책이 없었나? 이 세 모녀는 왜 삶을 놓아버린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수치스럽게 했을까? 정말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나? 나는 만일 기본소득이 있었
모친이 39년생 토끼띠이니 83세가 되었나보다. 46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육남매를 키워오셨다. 이번 추석에 비대면이기는 하지만 면회가 가능해서 요양원으로 면회를 갔다.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셔온 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나간다. 유리창 너머로 슬며시 쳐다본 얼굴에 주름이 많고 부쩍 늙으셨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시는 어머니였다. "행곤아 느그 집 좋더라. 천장도 높고" “아야, 느그 집서 이북이 가깝지야.” “옴매, 금강산 가보니 거지도 그런 거지들이 없드라.”하는 소리를 이번에도 여러 번 반복하셨다. 단 한번 단체로 금강산 관광 가셔서 보신 북쪽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신다. ‘쩝’ 외가의 내력인 치매가 심해지셨다. 외할머니, 큰 이모, 둘째 이모 모두 치매가 심하게 왔다가 돌아가셨다. 부친이 위암으로 투병하시다 큰 수술을 두 번 하셨지만 결국 돌아가셨을 때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때가 84년인데 나는 군대로 끌려가고 그 암담했던 시절을 어떻게든 모친이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헤쳐 나왔다. 그 풍상을 같이 겪어낸 어린 동생들은 모친을 대하는 애틋함이 남다르다. 나는 묘하게도 일찍 가신 부친이 더 애틋하다. 그런 모양이다. 막상 어린 동생들은
최근에 아내와 나는 《넷플릭스》를 통해 ‘오징어 게임’을 재미있게 봤다. 아내가 ‘오징어 게임’ 다음으로 나에게 ‘D.P.’를 추천했다. 그러나 나는 벌컥 화를 냈다. “보기 싫어. 내가 왜?” 아내는 그런 나의 단호함에 당황했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D.P.’는 '탈영병 추적'을 뜻하는 ‘Deserter Pursuit’의 줄임말이다. 그럼 왜 탈영을 하게 되었을까? ‘어, 이건 아닌데? 난 분명히 제대했는데, 왜 또 군대에 가는 거지?’ 비몽사몽 간에 억지로 큰 한숨과 함께 꿈에서 깼다. 다행히 꿈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아, 꿈이구나. 다행이다.’ 매번 이런 꿈을 꾸곤 한다. 휴가 마지막 날 위병소를 통해 부대로 복귀하는 꿈을 꾼다. 차마 돌아가기 싫은 곳. 군대였다. 내가 이런 악몽을 처음으로 꾼 것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는 동네 뒷산에 있는 당집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어두컴컴한 하수구를 비집고 들어가는 꿈을 자주 꿨다. 더는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고 몸이 하수구에 끼어서 옴짝달싹 못 할 때쯤에 꿈에서 깨곤 했다. 어른들은 키가 크려고 꾸는 꿈이라 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 내가 꾸는 악몽은 항상 같은
1980년 가을로 기억한다. 목포 유달산 자락에 자리 잡은 ‘반야사’라는 절에 해 질 무렵부터 꽤나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절 정문에는 제법 그럴싸하게 “반야의 밤”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한 학생이 불량기 있게 보이는 옆 친구에게 나직이 물었다. “야, 오늘 목포에서 한 가닥 한다는 것들 이리 다 모이는갑다.” 친구는 짝다리를 건들거리며 침을 찍 내뱉었다. 한눈에 봐도 불교학생회 다닐 것 같지 않은 불량한 학생들이 절에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부회장 여학생은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사실 부회장은 “반야의 밤” 행사에 밴드 부르는 것을 반대했다. ‘아니 절에서 하는 학생들 행사에 웬 밴드란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키만 멀쩡하게 큰 회장은 고등학생 밴드 ‘윙스’를 행사에 초청했다. 드디어 ‘반야의 밤’ 행사가 시작됐다. 반야사 대웅전이 활짝 열렸고 무대는 대웅전 마루였다. 대웅전과 대웅전 앞마당에 학생들이 그득했다. 찬불가도 부르고 반야심경도 외우고 승무도 추고 타령도 했다. 아주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종교행사였다. 그러다 저녁이 깊어지고 드디어 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컬기타, 베이스기타, 건반, 드럼이
까망이와의 이별은 빨리 찾아왔다. 형이 확정되자 이감 통보는 하루 전에 이루어졌다. 나는 보안과장에게 가서 까망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주장했지만 내 목소리는 높지 못했다. 모 재소자가 자신이 키우던 앵무새를 데리고 이감 간 케이스가 있기는 했다. 그 재소자는 무기수였다. 내 저항은 허무하게 끝났다. 나는 터덜터덜 돌아와서 짐을 쌌다. 나는 까망이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까망이는 눈치채지 못했다. 까망이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제 까망이는 8개월이 지나서 제법 몸집이 커졌다. 나는 까망이를 내 가슴 위에 올려두고 같이 잠을 청했다. 까망이 숨소리를 더 많이 기억하고 싶었다. 까망이는 사지를 쭉 뻗어서 코를 내 턱에 박고 가르릉 소리를 냈다. 나는 밤새 잠을 못 이뤘다. 새벽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까망이가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까망이 뒷발을 살짝 잡았다. “가지 마. 바보야, 나, 간다고….” 까망이가 내게로 와서 혀로 얼굴을 한번 핥더니 이불을 젖히고 나갔다. 이내 식구통 너머로 사라졌다. 짐은 단출했다. 그간 보던 책은 전부 집으로 부쳤다. 더블백 하나가 짐의 전부였다. 특사 동지들의 배웅을 받고 보안과로 향했다. 다행히 까망이는 보이지 않았다. 특
광주교도소 특사 동에서 아침 점호 시간이 끝나면 까망이는 내가 열어주는 식구통으로 사뿐히 뛰어올라 밖으로 나갔다. 자유 없는 감옥에서 유일하게 까망이만 자유로운 고양이였다. 까망이가 복도에서 ‘야옹’ 하고 한 번 울면 특사의 죄수들은 일제히 까망이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이려고 갖은 아양을 떨었다. 무엇보다 확실한 유혹은 먹을 것이었다. 멀건 국 멸치는 하급이었고, 일주일에 한번 배식되던 돼지고기 살코기는 고급이었다. 어떤 죄수는 사식으로 들어온 훈제 닭고기로 까망이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까망이는 여유롭게 이 방 저 방을 순시하듯이 드나들었다. 까망이를 영접한 죄수들은 어떻게든 까망이와 긴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까망이는 한 곳에 정을 주지 않았고 기특하게도 반드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홀쭉한 배로 출타했던 까망이가 저녁에 다시 내 방 식구통으로 넘어올 때는 얼마나 얻어먹었는지 배가 빵빵해져 뒤뚱거리면서 넘어왔다. 까망이는 나를 보며 ‘씩’ 하고 웃어 보였다. 까망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이제는 뺑기통 창을 통해 특사 밖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혔다. 어느 날 갑자기 ‘푸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까망이가 호들갑스럽게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
“쥐약을 지급하라. 쥐 때문에 못 살겠다.” 광주교도소 특별사동 10번 방. 나는 식구통에 대고 크게 외쳤다. 밥그릇으로 교도소 창살을 득득 긁었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특사를 지나 기결사동까지 퍼져갔다.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발로 문짝을 ‘쾅 쾅’ 찼다. “페스트 걸리면 교도소가 책임져라.” 나는 1시간 동안 쉼 없이 외치고 두드리고 찼다. 보안과 직원이 한번 들여다보고 갔다. 잠시 후 보안과장 호출이 있었다. “야, 고형권! 어떻게 쥐약을 주냐? 네가 먹고 죽으면 누가 책임지냐?” “그럼 쥐를 전부 잡아 없애던가.” 보안과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은 듯 나를 사동으로 돌려보냈다. 교도소에는 살찐 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밤에 뺑기통(화장실) 조그마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포동포동 살 오른 쥐들이 교도소 감시탑 조명 아래로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쥐들의 주요 루트는 하수구였다. 교도소에서는 뺑기통에 밥 먹고 남은 잔반도 버렸다. 모든 뺑기통은 하수구로 서로 통했다. 겁이 없어진 쥐들은 하수구로 올라와서 뺑기통까지 침투했다. 똥을 싸다가 어느 쥐의 영롱한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서 질겁을 한 적도 있었다. 쥐는 교도소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 있
나는 고개 들어 3층 학원을 바라본다. 둘째 아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원이다. 학원의 불빛이 아직은 밝다. 아들이 학원을 마치고 내려오려면 10분쯤 남았다. 나는 항상 10분 정도는 여유 있게 도착한다. 학원 끝나고 아들이 내려오면 바로 픽업해서 집에 데려가려는 셈이다. 피곤한 아들을 단 1분이라도 빨리 집에 데려가 쉬게 하고 싶은 욕심이다. 나는 핸드폰을 켜서 김윤아의 ‘길’이라는 노래를 듣는다. ‘세상 어딘가 저 길 가장 구석에 갈 길을 잃은 나를 찾아야만 해.’ 노래 가사가 요즘 나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즐겨 듣는 노래가 되었다. 그때 신호를 받고 탑차가 들어온다. 아마도 생선이나 야채를 배달하는 것 같은 냉동 탑차다. 익숙하고 묘한 동질감을 갖게 만드는 차다. 그동안 관찰해보니 탑차의 주인은 나와 같은 학부모였다. 학원에서 나오는 그 딸의 교복이 아들과 같았다. 어쩌면 아들과 같은 반인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 보았다. 탑차는 내 차를 지나쳐서 학원 앞에 바짝 차를 붙인다. 그때 딸이 아빠를 향해 손을 흔들고 탑차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서 아빠에게 하이파이브를 한다. 보이지 않아도 그 아빠의 으쓱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나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엄마, 나 좀 죽여줘.” 혀를 깨물어 붉은 빛을 띠는 A의 입에서 겨우 나온 말이었다. 엄마는 그런 딸을 잡고 오열했다. “같이 죽자. 같이 죽자.” 엄마의 말을 들은 A의 얼굴에 굵은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눈물을 닦을 수가 없었다. A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이었고 목 이하로는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자가 돼 있었다. 보고 들을 수 있었고 혀를 움직여 말할 수 있었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많았다. 손으로 밥을 떠서 먹을 수 없었다. 일어설 수 없었고 앉지도 걷지도 못했다. 배설도 자신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었다. 머리를 돌리지도 못했고 몸을 뒤집지도 못했다.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냄새가 맡아졌다. 온몸에서 올라오는 역겨운 땀 냄새와 똥 냄새, 등에 생긴 욕창 썩는 냄새를 고스란히 맡아야 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머리였다. 가려운 머리에서 푹푹 쉰 냄새가 났고 머리에 왕소금만한 비듬이 생겨 베개에 떨어졌고 이가 기어 다니며 머리를 깨무는 감각이 또렷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A는 죽을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기껏 한다는 것이 혀를 깨무는 것이었지만 죽지는 못했다. “시간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