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5일, 전국 법원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회가 개정을 추진하는 ‘사법개혁 3법’에 대해 집단적인 우려를 표명했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것이 이들의 주된 논리다. 하지만 국민의 시각에서 볼 때, 이번 법원장 회의의 모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특권의식이 그 배경이고, 작금의 사법 불신을 자초한 과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결여된 적반하장식 행보로 비춰질 뿐이다. 사법부가 ‘독립’이라는 가치를 내세우기 전에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과연 우리 법원이 국민의 상식과 법 감정에 부합하는 정의를 실현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 해 대선국면에서 보여준 대법원의 대선 개입 논란은 사법부의 독립성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특히 국민적 공분을 샀던 ‘윤석열 내란수괴 구속취소’와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들은 사법부가 법리가 아닌 정치를 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양심껏 심판해야 할 법관들이 오히려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특정 진영의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해온 것은 아닌지 뼈저린 성찰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번 법원장 회의에서 나온 발언들을 살펴보면 실망감은 더욱 커진다. 이들은 사법개혁 3법이 법관의
한국 현대시의 큰 나무인 최동호 선생이 지난달 20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한국문학의 미래에 관한 뜻깊은 강연을 했다. 주제는 ‘디지털 전환기 한국 현대시의 지향점과 시노래의 문화적 가치’였다. 이 강연은 MIT의 인간통찰 협력연구 프로그램인 MITIC(MIT Human Insight Collaborative)가 주관하는, ‘마스터 클래스 시리즈’의 초빙 강사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선생은 여기서 해당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견해를 제시했고, 현지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한국문학이 주요한 세계 무대에서 그 의의와 보람을 증명한 ‘사건’이자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주제론적 접근이었고, 한국문학으로서는 새 강역(疆域)의 개척이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안방에 앉아 구두선(口頭禪)으로 내놓는 주장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 그 현장을 찾아가며, 활달한 소통으로 현지 문화예술인들의 공명(共鳴)을 자아내는 기량과 노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국의 문학계나 문화정책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구체적 사례를 부양(浮揚)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선생은 미국
100세 시대, 퇴직 후 시간은 역할을 상실한 잔여 인생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다. 나는 주위의 다양한 삶을 통해 중노년기 삶은 얼마를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삶의 주요 요소들에 대한 비움과 재설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노년기에 있어 건강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대상인 것 같다. 젊은 시절, 건강이 ‘성취’라면, 이때의 건강은 ‘협상’이다. 신체는 더 이상 무한히 복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무리한 도전보다 지속 가능한 리듬이 중요하다. 규칙적인 수면, 균형 잡힌 식사, 적정한 운동은 삶의 독립성을 지키는 최소 조건이다. 특히 근력과 정신건강의 유지는 단순한 체력이 아니라 존엄의 문제다. 타인의 도움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신체적 자율성은 곧 심리적 자율성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 또한 관계의 재정비가 필요하다. 인간관계는 양보다 질이 중요해진다. 모든 관계를 유지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소진을 야기한다. 상호 존중과 정서적 안정을 주는 밀도 있는 관계에 집중하고, 의무감만 존재하는 관계는 정중히 거리를 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우자와의 관계 역시 ‘역할’ 중심에서 ‘동반자’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녀가 독립한 이후, 부부는 다시
경기도 내 학교에서 다음 달부터 시행되는 ‘학생맞춤형통합지원(학맞통)’을 놓고 부실 운영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제도를 담당할 전문 인력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도내 약 2526개 학교 가운데 학맞통 업무를 담당할 교육복지사가 배치된 곳은 고작 151곳으로서 전체의 6%에 불과하다. 이 정도의 인력으로 정책의 실효성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인력공급 확대를 비롯한 제대로 된 지원체제가 시급하다. 지난해 1월 21일 제정돼 오는 3월 1일부터 전면 시행될 예정인 ‘학생맞춤통합지원법’은 모든 학생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전인적 인재로 성장하는 데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안이다. 학업 부진, 정서 문제, 학교폭력, 빈곤, 가족 갈등, 또래 관계 어려움 등 복합적 위기 상황에 놓인 학생을 학교가 직접 발굴해 지원하는 제도인 셈이다. 학맞통은 학생에 대한 ‘통합 진단’을 바탕으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추진되며,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복합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이 늘어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동안에도 학생 지원을 위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이 운영되어 왔으나 각 사업이 분절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원의 중복, 사각지대
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은 숭례문에서 서울역을 지나고 청파동입구교차로에서 경부선 철도 밑의 쌍굴다리 2차선 도로를 건너 남북 방향 6차선의 청파로를 만난다. 너푸내란 하천과 옛길을 함께 복개하여 만든 도로다. 옛 문헌과 지도에는 한자 蔓(넝쿨 만), 草(풀 초), 川(내 천)의 뜻을 따서 蔓草川(만초천)으로 표기했다.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인왕산의 서남쪽과 안산의 동남쪽 골짜기의 물을 모아 남쪽으로 흐르다가 원효대교 부근에서 한강에 합류한다. 6차선의 청파로 건너편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빌딩 앞에 청파배다리의 표지석이 있는데, 이렇게 적혀 있다. “청파배다리 터(靑坡舟橋址) : 청파·원효로로 통하는 주요 길목과 만초천(蔓草川, 너푸내)이 만나는 지점에 놓였던 돌다리인 청파배다리가 있던 곳이다. 원래는 북쪽으로 300여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 이 지역은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남대문 정거장, 즉 지금의 서울역이 1900년 7월 8일에 생기면서 옛길과 너푸내의 유로가 꽤 변했다. 너푸내를 건너던 청파배다리의 위치가 북쪽 300여 m 떨어진 철길 위에 있었다는 문구가 그래서 기록됐다. 다만 일제강점기의 1:5만 지형도에는 쌍굴다리 길로 경부선 철길 밑을 지나 청파
언어 수행 차원에서 인격 발달의 성숙을 보이는 인간을 말하라면, ‘듣는 인간’이 여기에 근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듣는 인간’에게서 ‘긍정의 철학’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 긍정성은 개인의 성숙에 그치지 않는다. 긍정의 지향이 관계들의 선순환과 소통을 대화적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성숙이 돋보인다. 일상 현실 속 사람들의 구체적 언어 수행에서 인간적 성숙을 감득하게 하는 장면도 ‘말하는 인간’보다는 ‘듣는 인간’에게서 경험할 때가 많다. ‘듣는 인간’은 불가피하게 실천적이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말하기와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듣기의 현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듣는 인간’은 ‘잘 듣는(들으려는) 인간’이다. ‘잘 듣는 인간’에서 ‘잘’은 기능적 숙련만을 뜻하지 않는다. 지각의 뛰어남과 정의(情意 Affective)의 원만 풍성함과 윤리의 아름다움을 모두 실천해 내는 수준을 뜻한다. ‘잘 듣는 인간’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의 자질을 자신의 듣는 역량 수준으로 고르게 녹여 넣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듣는다’의 함의는 참으로 깊고 두텁다. 논어의 이인(里仁)편에는 ‘조문도
[ 경기신문 = 황기홍 화백]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 올림픽 치러진 가운데, 올림픽 선수들보다도 스포츠 중계에 더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의 열기가 차갑게 식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스포츠 중계권의 역사와 자본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1938년은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들에 뜻깊은 해였다. 야구 경기 실황을 중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은 해이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야구단 피츠버그 파이러츠 소유주는 일부 라디오 방송사들과 파이러츠의 경기를 방송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자 라디오 방송사 KQV는 창의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KQV는 파이러츠와 계약 없이, 야구장 밖에서 경기를 관람하면서 방송을 전송하려 한 것이다. 법정 다툼이 벌어졌고, 법원은 파이러츠 구단이 야구 경기 실황 중계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판시하였다. 1938년 이루어진 피츠버그 애슬레틱 대 KQV 방송사 판결이다. 이로써 개별 구단은 방송사와 중계방송을 판매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역으로, 방송사가 스포츠를 중계하기 위해서는 K리그, KBO, FIFA, IOC 등 스포츠 경기 주관자와의 권리 계약을 통해
지난 13일 통계청에 따르면 화성특례시는 최근 2년 새 4만 4000여 명이나 증가했다. 급격한 도시 성장으로 인구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교통, 치안, 의료, 교육, 체육 등 여러 부문에서의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시급히 해소돼야 할 부문 가운데 하나는 치안 공백이다. 화성특례시는 2025년 1월 특례시 출범과 함께 올해 2월 4개 구청 출범시켰다. 서울특별시의 1.4배에 달하는 면적(844㎢)과 전국 기초지방정부 가운데 4위에 해당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경찰서는 두 곳밖에 없다. 화성동탄경찰서(동탄신도시권·정남·병점)와 화성서부경찰서(봉담·양감·향남·우정·장안·송·새솔동권) 단 두 곳의 경찰서만 운영되고 있다. 같은 특례시인 수원시(4곳)와 고양시(3곳), 용인시(3곳)와 비교된다. 인구 규모와 면적을 고려하면 최소 3~4곳의 경찰서가 필요함에도 화성시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해 11월에도 인구 증가와 광범위한 행정구역으로 인한 시민 안전 확보와 치안 대응력 강화를 위해 경찰서 1개소를 추가 신설해 달라고 경기남부경찰청에 공식 건의한바 있다. 특히 신도시급 대단위 아파트들이 들
약 5년 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한국은 주택 공급을 이유로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인권을 유린하는 후진국형 문제를 여전히 재현하고 있다. 하남 교산 역시 재개발 명분을 앞세워 포클레인을 끌고 들어와 나무, 집, 물류창고, 농협, 마트, 학교, 교회를 무참히 부수고 있다. 내가 사는 남한산성 산밑도 굉음 소리와 시멘트, 철근 덩어리로 덮여간다. 나는 철거 명령을 받았지만,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폐허가 된 마을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물 주전자의 수증기가 유일한 온기다. 나는 LH에서 등기로 날아온 서류를 받아 들고 뒤적이다 겁에 질렸다. 방안을 서성거리다 불안한 맘을 억누르려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소장이 날아왔어, 계란 껍데기 같은 이 집에 30,000,100원 부당이득금을 내야 한다면서 당장 떠나라는 거야!” 같은 처지에 놓은 뒷집 주인은 거처를 구하러 다녀봤지만, 살인적인 집값 때문에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천정부지로 오른 임대료에 LH에서 쫓겨난 주민들의 임차수요까지 겹쳐 하남 부근의 주거비 인플레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70대 노인 심씨는 계곡
설 명절 기간에 수입 농축수산물이 국산으로 둔갑해 판매된 사례가 대거 적발돼온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산 프리미엄’을 노린 원산지 표시 위반은 물가를 끌어 올리는 것은 물론 시장의 신뢰를 흔드는 악덕 상술이다. 값싼 수입 식품 재료를 ‘포대갈이’, ‘상표 둔갑’ 등의 수법으로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하는 상술은 어제오늘의 부정 유통 사례가 아니다. 더욱더 정밀한 근절대책으로 이제는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문금주 의원(민주당), 정희용 의원(국민의힘) 등이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최근 5년간 원산지 표시 위반으로 적발된 업체는 모두 1만6072곳으로 집계됐다. 정부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연간 적발률은 2021년 1.8%, 2022년 1.7%, 2023년 1.4%, 2024년 1.3%, 2025년 1.2% 등으로 매년 낮아지는 추세다. 그러나 설 특별 단속 기간의 수치는 2021년 4.1%, 2022년 3.5%, 2023년 4.74%, 2024년 3.3%, 2025년 3.9% 등으로 연간 평균(1.4%)보다 2.7배나 높았다. 이는 설 명절을 전후하여 원산지 표시법
설 명절을 맞아 친정집에 갔다. 북적이는 가족들로 소란스러운 틈을 잠시 벗어나 오랜만에 엄마의 방을 둘러보았다. 입었던 옷가지와 매일 쓰는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작은 책상에는 펼쳐둔 성경책과 마시다 만 물컵이 놓여 있었다. 혼자 잠들고 일어나는 침대에는 엄마가 누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피가 묵직한 겨울 이불이 정리되지 않은 채 한곳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한 사람이 머문 공간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이 방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밤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엄마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때로는 짐이었고 때로는 힘이 되었을 자식들을 키워내고, 물러난 자리는 홀로 남은 방이었다. 그 방을 보며 알았다. 독거(獨居)는 공간이 아니라 고요히 흐르는 시간이라는 것을. 엄마의 방을 보고 있자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치매가 심해지면서 요양병원에 모셨다. 병원에 처음 가셨을 때부터 아버지는 우리를 볼 때마다 집에 가겠다고 했다. 기억은 흐릿해졌어도, 돌아가야 할 방향만은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낯선 곳에서 혼자서 잠들고 깨어나 가족들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계시는 요양병원에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