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 사는 한 노파가 변호사에게 두 가지 유언을 했다. 첫째는 죽게 되면 화장할 것. 두 번째로는 유골은 반드시 뉴욕 맨해튼 최대 번화가에 뿌려줄 것이었다. 의아했던 변호사가 노파에게 물었다. “왜 하필이면 뉴욕 맨해튼입니까?” 노파는 말했다. “쇼핑을 좋아하는 내 딸들이 반드시 일주일에 두 번은 방문해 줄 것 같아서요.”라고.
사람도 나이 들어 동진강 폐선 같이 뻘 속에 처박혀 있는 듯하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관심 밖의 삶으로써 비루먹은 망아지 꼴이 되는가 싶다. 나는 해방둥이 세대로서 스스로의 심장을 펌프질하며 열광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다. 그 힘으로 가정의 안정과 가족들을 건사했다. 열광하는 삶에서 한결같은 삶을 고집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쁠 것 없는 노인세대가 되었다. 미국 노파의 심정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남은 인생의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유머 같은 노파의 이야기가 울음보다 더 서글픈 정서의 현을 건드린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청년의 꼭지점에서는 우정에 대한 철학도 자못 심각했다. ‘대신 죽어줄 친구나 천하를 반분할 수 있는 우정의 도를 저울질하기도 했다. 공무원으로 취직하기 위해서는 신원조회가 필수였다. 그 당시 신원조회서 양식에는 친구 이름을 적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사회적 상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좋은 친구가 될 노력보다 편하게 대해주는 친구가 좋다는 이기심도 컸다. 고향 친구가 좋다는 뿌리의식과 성취의 성향에 따른 길동무가 좋기도 했다.
나에게는 국립대학과 교육계에서 근무하던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안정된 직장에서 세상사 따질 것 없이 살아가는 선한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며 여행 일정도 잡아 함께 떠나 낯선 길 위의 시간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내 몸과 정신에는 열정이 넘쳤다. 함께 술을 마실 때, 오늘은 2차 3차 갈지도 모르니 내 몸의 소화기관에 잘 부탁한다고 하면 그런대로 들어주었다. 그 무렵 친구들과 안골에 있는 ‘송아지’라는 음식점을 가끔 들렀다. 젊은 주인은 산을 좋아해 등산을 자주 한다고 했다. 나는 산악연맹 고문이었기에 그와의 대화는 반죽이 맞았다.
여름날 그 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다. 말수 적은 친구가 내게 건배사를 하라고 했다. 갑작스러웠다. 머릿속 회전 속도를 죄며 생각해 보아도 멋진 건배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옆에서는 젊은 아가씨가 우리에게 서빙을 하고 있었다. 생각 끝에 몇 가지 건배사에서 콕 찍어다 쓴다는 게 ‘마돈나’이었다. 내가 ‘마돈나’ 하면 함께 ‘마돈나’ 하자고 했다. 이어서 내가 선창을 하고 같이 술잔을 부딪치며 “마돈나”를 크게 외쳤다. 옆에 있던 아가씨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마시고 돈 내고 나가자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날씬한 몸매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아가씨는 명 건배사라고 하고서 웃음을 날리며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마돈나’라고 하면 미국의 음악가요 배우로서의 마돈나(Madonna)가 떠오른다. 우리 시대의 젊음을 고스란히 껴안아 섹시하게 느껴졌던 여인이다. 그래서 나는 잊어먹지 않고 기회가 오면 마돈나를 선창하곤 한다. 건배사는 ‘하늘 건(乾)’, ‘마를 건’으로서 술잔을 쉽게 비우자는 뜻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원 샷을 즐겼다고 하는 것을 보면, 술 마시는 분위기도 시원시원한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건배사는 분위기를 모아 주석의 흥을 돋우는 아나운서의 멘트 같은 것으로 자축의 뜻이 크다. 그런데 보통 술자리에서는 그 순간의 기분을 살려 사양하지 말고 즐겁게 마시자는 의미가 우선이다. 그래서일까. 젊은 층에서는 ‘마취제’ (마시고 취하는 게 제일이다)라는 건배사를 많이 쓰고, 중국의 건배사에는 ‘우정이 깊으면 링거 맞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셔’라는 건배사가 있다고 한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다.’는 말이 있다. 이제는 가슴 뛰는 즐거움도, 내일 죽어도 오케이 하면서 술 마실 일도, 체력도, 주변사람도 없다. 세상도 사회도 미국의 노파 같이 외롭고 건조할 뿐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친구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술 한 잔 마시며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노래하면서, ‘푸른 건배사’로써 힘껏 “마돈나!”를 외치고 싶다. 이 더위에 건배사라도 푸르고 희망찬 기운이어야 하지 않겠는가.